[차별너머 아카데미] (끝) 유연희 박사의 퀴어신학 이해하기 리뷰

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평등의 무지개' 현수막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펼쳐지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9년 6월 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평등의 무지개' 현수막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펼쳐지고 있다.  여성신문 

차별너머 아카데미 마지막 강의를 맡은 유연희 박사는 이미 여러 권의 번역서가 나온 패트릭 쳉의 대표 저서인 『급진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퀴어신학의 주요 흐름과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미국 성공회 사제인 패트릭 쳉은 성소수자인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퀴어 신학자들의 이론을 정리하여 소개하는 데 힘써온 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퀴어”라고 하면 보수적인 신자들은 동성애나 변태적인 성적 욕망을 상상하지만 유연희 박사는 퀴어의 의미를 “고정된 규범에 반대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퀴어신학은 “(기존의) 범주에 도전하고 전통적인 신학 주제와 담론을 퀴어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퀴어신학은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의 네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펼쳐집니다. 퀴어신학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사용되는 성서 본문을 재해석하고 성소수자에 대해 억압적이지 않았던 교회 역사와 전통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또한 인간의 이성적 활동을 통해 자연과 창조 질서 속에서 동성애나 젠더 행동들을 관찰하며, 섹슈얼리티, 젠더 정체성, 성별, 인종, 기타 정체성들의 다층적인 관계를 연구합니다. 마지막으로 퀴어신학은 성소수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하느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급진적인 사랑』에서는 이 네 가지를 바탕으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관한 퀴어신학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하느님: 급진적인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고 함께 나누기 위해 성서와 이성, 그리고 인간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합니다. 이것을 퀴어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커밍아웃-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커밍아웃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강자와 약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알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앎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창조는 육(물질)과 영의 이원론,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퀴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교리인 원죄개념이 오히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무너뜨린다고 설명합니다. 즉, 원죄는 인종, 성별,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으로 인간의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급진적인 사랑으로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선악의 경계선들-정결함과 더러움, 거룩함과 세속적임, 성인과 죄인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성애와 동성애의 경계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타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비난하며 부활은 그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퀴어신학은 성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아온 폭력의 역사에 비추어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봅니다.

성령: 퀴어신학에서 성령은 하느님의 급진적인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분입니다. 성령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타인과 사랑에 빠지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야기는 장소, 공동체, 인종, 성별 등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함께 복음을 들었던 사건입니다. 성령은 예측할 수 없고 놀라운 방식으로 일한다는 점에서 퀴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본 퀴어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급진적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딸이자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새로운 하와”로서 “새로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와 짝을 이룬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경계선을 뛰어넘는다고 말하거나, 예수의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에 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를 퀴어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는 것은 성서의 모든 인물이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하고 읽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퀴어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패트릭 쳉의 <급진적인 사랑>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신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신학의 영역에는 창조, 원죄, 속죄, 부활,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등의 교리에 관한 다양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논쟁이 존재합니다. 퀴어신학은 그 교리들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다만 그 표현을 퀴어 용어로 대체하거나(예를 들면, 계시=>커밍 아웃), 위에서 본 것처럼 기존의 설명에 퀴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설명을 덧붙일 뿐입니다. 물론 패트릭 쳉의 입장이 퀴어 전체의 입장은 아닙니다. LGBTQ 이외의 다양한 존재의 신앙 경험이 있고 또다른 퀴어신학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퀴어신학을 한 가지 입장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이미 퀴어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를 근거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통해 여성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 신학을 주장했습니다. 성서를 근거로 흑인에 대한 노예화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모든 인종의 평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흑인신학과 우머니스트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성서를 근거로 독재와 억압을 정당화하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민중의 해방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해방신학, 민중신학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서를 근거로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성적지향, 성정체성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퀴어 신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학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의 신학과 신앙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배척했지만, 다양한 신학, 성서를 읽는 다양한 관점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이 세상의 다양한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여전히 성서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퀴어 신학 역시 신학의 역사의 일부가 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퀴어신학은 이단이며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계략이라고 말하는 분들에게 이 구절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사도행전 5:38-39).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퀴어 신학은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퀴어 신학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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