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차별너머 아카데미] 4강 리뷰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 이론: 『젠더 트러블』을 중심으로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번역,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번역,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한국 개신교 문화에서 태어나 그 분위기와 환경 더 나아가 생각의 회로까지도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젠더’라는 개념 혹은 속뜻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이하 버틀러)를 통해, 우리는 지금의 보수적 한국 개신교를 ‘응시’할 필요가 있다. 자기 객관화로 가는 그 길을 버틀러가 제공한다.

‘젠더’라는 단어가 주는 낯섬과 거부감은 한국개신교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별히 차별금지 혹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알레르기 반응과 더불어 신경증적 징후들이 개개인들에게 과도하게 나타난다. 이는 배타와 배제 행위 혹은 혐오정치운동으로 나타난다. 역설적이게도 배제와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용하고, 그분은 그런 위인이 아니었다고 도리어 항변한다. 버틀러는 보수 한국개신교인과 같은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비판한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분법과 이원론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버틀러는 양쪽이 아닌 그 중간, 양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들의 소외, 배제를 말한다. 이들은 바로 차별과 위계에서 벗어난, 언어적 그리고 구조적 폭력을 당하는 당사자들이다.

강한 신념과 믿음체계는 확고함을 요구한다. 대부분, 믿음이 강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조금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거리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특히 형이상학적 구조의 상부구조에서의 의미는 시대와 환경 그리고 그 흐름에 따라서 의미화와 재의미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라는 기표가 주는 그 기의는 다양하다. 80억 인구 중에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상징계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이미 한국 개신교의 교인 수 감소의 원인을 이슬람의 침공과 이 세대의 성적타락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각종 교단의 정책과 법들이 이에 맞춰진다. 이에 버틀러는 계보학적 방법론을 통해 결과는 원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이미 담론 작용의 결과인 것이라 분석한다. 보수적이라고 자처했던 한국 개신교가 극우성향을 띠면서, 혐오와 배제의 전략이 극으로 치닫는 것은 어찌 보면, 한국개신교 목사들의 성경의 해석방식과 보수적인 성향이 한 몫 한 것은 사실이나,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역할은 한 것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교회 ‘법’의 테두리가 이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수행, 신앙생활은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교회 밖의 ‘담론’들을 터무니 없는 가짜뉴스로 정형화시키고 단순화시킨다. 실 예가 EBS의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에 출연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강의에 대한 보수개신교들의 폭력적 항의이다. 유독 버틀러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이 가짜 뉴스-소아성애자 등-로 특정 보수 개신교인들에게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주입되었다.

『젠더 트러블』을 읽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들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시몬느 보봐르, 이리가레, 미셸 푸코, 지그문트 프로이트, 라캉, 크리스테바, 레비스트로스 등의 논리에 트러블을 일으킨다. 이 모든 것들을 버틀러는 보편성을 무대 위에 올린다. 경쟁하는 보편성, 열린 보편성을 통해서 재(再)의미화가 결코 혼란스러운 과정이 아님을 말한다. 특별히 인간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상호의존성을 견지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을 행위의 주체로 받아들이고 삶은 ‘투쟁’인 셈이다. 보편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재 개념하 하는 그 ‘힘’과 ‘권력’은 누구로부터 행사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기묘하게도 우리는 후천적으로 의미를 얻고 획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투쟁의 앞서서의 마음가짐과 용기도 필요하지만, 투쟁 후, 자기성찰과 응시도 꼭 필요하다. ‘투쟁’은 의미화의 과정인 동시에 자유를 향한 여정이다. ‘투쟁’하고자 마음먹은 우리는 보편성의 무대에서의 카오스모스적 군무인 셈이다.

Shall we Dance?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젠더는 반복된 몸의 형식화 혹은 양식화이며, 수행적으로 연출된다. 이분법을 벗어난 전복적인 연출과 수행적 기반을 통한 내 몸의 스타일화가 필요하다. 이 연출은 정형화된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 그 개념에 이상화된 전형이 아닌, 뒤틀어서 해석하는 유희나 유머로 승화시키는 패러디를 감행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행위자 없이 행위만 남는 반복적 수행. 이는 'sex'나 ‘sexuality'가 이원론에 묶이지 않고, 태어날 때 배정받은 젠더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해부학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해방이다.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경직되어, 춤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만의 진리를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전역을 반복된 행동으로 청중들의 변화의 단초를 제공하며, 제자들에게 변화된 정체성, 그리고 기존의 다른 표현을 만든 창조성을 외면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하는 방식, 행동, 말하는 것, 신앙생활도 변화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수행했고, 이스라엘이라는 보편성의 무대 위에서 춤을 멋들어지게 췄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복적 수행은, 투쟁의 방식으로, 희생의 방식으로, 궁극적 사랑의 방식으로, 열린 연합 즉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몸소 보여줬고, 의미화의 재의미화를 통해 기존의 기득권들과 폭력제국에 투쟁했다. 얼마나 힙하고 갓벽한 지도력인가? Respect!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오역하고 이분법의 체계화하고 서열화하는 여전히 가짜뉴스라는 사탄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 개신교를 향해서 보편성의 무대에 함께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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