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차별너머 아카데미] 3강 리뷰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린 1일 서울광장 인근에서 보수·기독계 단체들이 반동성애·퀴어축제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린 지난 2019년 6월 1일 서울광장 인근에서 보수·기독계 단체들이 반동성애·퀴어축제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여성신문

지난 4월 13일 저녁, 차별너머 아카데미는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의 ‘성소수자 혐오가 보수정치에 이용되는 방식’의 주제로 진행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우파가 경제 정치적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벌린 전략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처음 그들은 반공 이념을 내세웠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혐오를 주요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혐오 선동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찬성과 반대’라는 대립구조로 흩뜨러진 인권, 평등, 차별의 논의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평화롭게 전환할 것인지에 대해 듣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를 들으며 계속 생각에 맴 돈 것은 ‘찬성과 반대’였다. 우리는 참으로 지독한 이지선다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애초에 선악과를 탐한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옳고 그름, 남과 북, 찬성과 반대, 둘 중 하나만 골라야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이 사회의 기득권은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선택을 강요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과 분단, 반공의 시대와 민주화 운동의 시대를 지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혐오정치의 시대까지. 힘을 가진 사람들은 늘 찬성이냐 반대냐를 물어왔고 그들의 편에 선 사람들은 부와 안위를, 그 선동을 거부한 사람들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는 차별너머 아카데미 3강 강연자로 나서 ‘성소수자 혐오가 보수정치에 이용되는 방식’의 주제로 발표했다. ⓒ나영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는 차별너머 아카데미 3강 강연자로 나서 ‘성소수자 혐오가 보수정치에 이용되는 방식’의 주제로 발표했다. ⓒ나영

성경의 이름으로 만든 혐오와 차별의 근거 

이런 양극단의 사회에선 안전보다는 효율이, 생명보단 이윤이, 평화보단 전쟁이, 생태보단 경제가 선택받는다. 그러니 세월호 참사 9주기가 되도록 참사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스텔라데이지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노동 현장에서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고, 끝없는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잔인하게 쫓겨난다. 강정과 소성리에선 비명이 들리고, 무분별한 자연개발 반대와 기후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공허하게 흩어진다. 이런 끔찍한 소용돌이 속에서 성소수자, 장애인과 같이 지워진 존재들의 삶은 혐오와 차별로 짓눌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속상한 것은 이 모든 일에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해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본과 권력을 축복하고, 성경의 이름으로 혐오와 차별의 근거를 만들며 교회의 배를 불렸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며, 그것에 반하는 것은 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자 애쓰는 기독교인들과 신학생, 목회자들을 “동성애를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한 마디로 찍어 누르고 있다. 덕분에 이동환 목사는 감리회로부터 정직 2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아야했고, 수많은 신학생들과 진급자, 안수예정자들이 감리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찬성과 반대’는 우리를 제자리걸음 하게 만든다. 정의와 평화, 인권과 평등의 구체적인 맥락을 생략한 채 본질을 흩뜨리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틀에 가둬 화해와 용서를 잊게 만든다. 저항의 언어마저도 이분법의 언어 안에 갇혀 다음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한다. 

이윤과 손해, 옳고 그름의 좁은 세계를 부수고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찬성과 반대’라는 납작한 속임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어져 왔다. 아무리 자본과 권력이 ‘찬성과 반대’의 두 갈래 길을 밀어붙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려 애써도, 이 세상은 그 두 갈래 길 옆 오솔길로 걸어가는 이들을 따라 나아간다. 그 오솔길은 ‘당신’이다. 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당신, 오늘을 겨우 살아내고 내일이 두려워 잠을 설치는 당신이 바로 그 오솔길이다. 당신이라는 나약한 길을 만났기에 우리는 혐오와 차별을 뛰어넘어 사랑과 연대로 단단히 묶일 수 있었다. 이윤과 손해, 옳고 그름의 좁은 세계를 부수고 당신에게 가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권력에게 죽임당한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기독교의 믿음은 넓고 커다란 두 갈래 길을 벗어나 좁고 험한 오솔길로 향하는 용기다. 혐오와 차별의 근거로 이용당하는 쓰레기가 아니며, 자본과 권력에 빌붙은 기생충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독식하는 바벨탑을 불태우고 나약한 생명을 살리는 역설의 불꽃이다. 우리는 안다. 아무리 저들이 ‘찬성과 반대’를 운운하며 문제를 왜곡하고, 돈과 힘으로 우리의 길을 막으려 해도, 결국 우리가 가는 오솔길을 따라 이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을. 역사가 저들을 옹졸한 패배자로 기억할 것임을. 사랑이 승리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어서 회개들 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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