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너머아카데미 5강 리뷰

인간의 DNA가 샅샅이 분석되고 복제인간이 논의되는 시대, 태양계의 위성에 생명체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고 챗(chat)GPT가 왠만한 목사보다 훌륭한 설교문을 작성한다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아니 포스트휴먼 시대에 기독교는 세상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16세기 루터의 성서해석이나, 인간의 죄성이 정자를 통해 유전된다는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기독교의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차별너머 아카데미에서 열린 5번째 강의에 참여했다. 이번 강의는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의 정선우와 함께 미셸 푸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푸코는 한국의 보수 개신교에서 꽤나 싫어하는 학자이다. 그러나 그와는 무관하게그는 현대 문명이 낳은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지성 가운데 한 명이다. “20세기 가장 저명한 철학자”, “80년대 이후 전세계 인문학 논문에 가장 많이 인용된 인물”, “근대를 종식시키고 현대적 사유의 문을 연 선구자” 등 그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성의 역사』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번역, 나남 펴냄
『성의 역사』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번역, 나남 펴냄

이번 강의는 푸코의 여러 저서 가운데 『섹슈얼리티의 역사(성의 역사』를 다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중세 크리스텐덤의 몰락 이후 근대의 역사는 ‘이성’과 그 이성의 ‘주체’인 개인에 뿌리를 내리고 거침없는 진보를 전개했다. 인간은 자유로워진 듯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이룩할 듯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이성’에 대한 인류의 낙관은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푸코의 사유가 시작된다. 초기의 푸코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계승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의 인식, 사고는 결국 언어라는 사회적 기호체계의 틀 안에서 주조된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한 시대 혹은 사회는 이런 틀 안에서 더 큰 틀 소위 ‘담론’을 형성한다. 푸코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이 담론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세상을 바라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특히 담론과 권력의 상호작용과 관계성에 주목한다. 

푸코는 그의 학문적 방법론인 계보학을 통해 권력의 기원을 조사한다. 그리고 권력의 본질과 행사방식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자명한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우연적이고 취약한 토대를 가진다는 것을 폭로한다. 푸코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이 소유되기보다는 행사되는 것임과,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들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일 뿐임을 밝힌다. 쉽게 말해 권력이란 사회의 무수한 지점으로부터 다양하게 행사되는 것으로 특정한 누군가가 소유했는가 보다는 어떤 관계에서 행사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섹슈얼리티의 역사를 조명한다. 푸코에 의하면 성에 관한 담론들은 중세를 벗어나 근대가 시작된 17세기 이래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새롭게 구별되고 확립됐다. 개인의 신체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류하는 섹슈얼리티 장치가 구축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18세기에 들어서 성은 ‘인구’라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했으며, 심판이나 정죄의 대상에서 통제와 관리, 조절과 규제의 대상으로 변이한다. 푸코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성’과 ‘섹슈얼리티’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은 근본적 ‘실재’가 아니며 섹슈얼리티가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형상’이다. 따라서 분석의 방향은 성이 아니라 섹슈얼리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이 신체의 물질성과 에너지, 감각들, 쾌락들을 장악하는 섹슈얼리티 장치 안에서, 성은 가장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며 내적인 요소가 된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또한 섹슈얼리티 장치 안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남색’은 고대나 중세에도 법적 금지와 처벌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이는 혼인 관계 바깥에 위치한 여러 금지행위의 하나였을 뿐, 어떤 특수한 유형으로 개념되거나 구별되던 것은 아니다. ‘동성애’라는 새로운 섹슈얼리티의 범주(심리학적, 정신의학적)가 확립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며, 19세기에 들어 동성애자는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고백을 요구받는 대상이 된 것이다. 

푸코는 동성애의 문제를 “나는 누구인가? 내 욕망의 비밀은 무엇인가”로 돌리는 것을 지양한다. 그리고 “동성애를 통해 어떤 관계들이 설립되고, 발명되고, 조정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나은 선택임을 말한다. 개인의 성적 욕망(desire)을 발견하고 규명하는데 애쓰는 것보다는 다양한 관계들과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사용하는 것이 국경이 사라지고 수많은 낯선 다양성이 교류되는 현대사회를 위해 더 바람직하지(desirable) 않겠냐는 조언이다. 

어쩌면 이성애 중심주의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 사회와 교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동성애나 양성애적 성적행동 자체보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연대들이 형성되고 예측하지 못한 권력의 주체들이 탄생하는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아두시라, 다양한 섹슈얼리티에 개방적인 지구촌의 도시들의 경제적 생산성이나 삶의 질이 그렇지 않은 도시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억하시라, 유대교의 견고한 율법과 신앙을 해체하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진리를. 또한, 현대를 외면한 채 중세에 머물고 있는 예배당에는 아마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공포에 사로잡힌 노인들만이 남아 있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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