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수년 전,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연구’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바뀐 이름은 시흥스마트허브, 시화공단으로 잘 알려진 곳의 배후주거지에서 맞벌이로 또는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의 역할을 한 명씩 분담하여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들을 만났고, 지역아동센터의 소개로 아동들을 만났다.
아동들을 그룹으로 인터뷰 하던 때였다. 그룹 인터뷰에 참여하던 아동 중 한 명은 당시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세요?’라는 나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에겐 엄마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있을 것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랜 기간 습관으로 배인 단어를 바꾸지 못하고 뱉어버린 나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질문은 대체로, 살고 있는 곳의 환경을 묻는 일,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만족도, 양육자가 하는 일과 근무 시간, 가족과 잘 소통하며 지내는 지 등을 묻는 것으로 진행됐다.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아버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 경제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부모님의 싸움, 잔소리가 많고 엄격한 할아버지 등 저마다 안고 있는 가정환경 내 고충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대체로 그래도 씩씩하게 일상을 살고 있었고, 고민이 있을 때 함께 나눌 가족과 친구가 있었고, 활발하게 재잘거렸다. 그러나 유독 모든 답변을 힘겹게 이어간 아이는 바로 내가 인터뷰 시작부터 사과를 했던 아이였다.
가장 힘든 기억을 묻는 말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두 살 때부터 아빠와만 쭉 함께 살았다는 그 아동은 어렸을 때부터 돌봄을 받은 경험과 기억이 없다고 했다. 지금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해 꼭 바꾸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묻는 말에, 그는 자신의 탄생을 막기 위해 엄마 아빠의 결혼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얘기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그가 그때까지 견뎌왔을 시간을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한 아이가 영하 10도~20도를 넘나드는 추위에 내복차림으로 밖에 나와 엄마를 찾았다는 기사가 났다. 양천구 입양부모의 학대 사건 이후 아동 학대에 대한 여론의 민감도가 높아진 시기, 아동 학대가 아니냐는 의심이 먼저 뻗쳤다. 이혼 후, 쉼터에 있다가 나와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이혼부로부터 양육수당도 거의 받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아이를 돌볼 겨를을 내지 못한 사이 발생한 일이라 했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수년 전에 만났던, 그 아이가 생각났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말을 걸어주고, 관심을 지속하는 정서적 돌봄이 필요하다. 동시에 아이에게는 정상적인 발육과 성장에 필요한 먹거리, 안전한 주거환경과 교육활동 등을 제공하기 위한 금전적 지원도 필요하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곳에서 아이는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 벌어서 먹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돌봄 노동까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라는 것은 불가능을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아이들에게도 전가된다.
책 『돌봄민주주의』에 이런 문장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일도 하고 시민 역할도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누군가는 불공평하게 돌봄의 의무를 떠안고 있다면, 민주주의 이론은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는 그 임무를 다하고 있는가. 우리를 그것을 물어야 한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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