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탐구-W초대석] 정재숙 문화재청장
존구자명(存久自明) 새기고 현장 누벼, 핵심 파악해 대화

정재숙 문화재청장
정재숙 문화재청장

 

소통·협업으로 청 안팎서 신망 / 문화재청 예산 사상 첫 1조 돌파

명쾌하다. 이리저리 재지 않는다. 누구나 반갑게 대한다. 정재숙 제10대 문화재청장의 별명은 ‘명랑소녀’다. 그가 있으면 어디든 금세 활기차진다. 관료나 교수가 주로 맡아왔던 문화재청장 자리에 기자 출신이 임명됐을 때 주위의 반응은 “아니~” 였다. 여성 청장은 변영섭, 나선화 씨에 이어 세번째지만 기자로는 처음이다.

취임 2년 3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주위의 그런 놀라움과 우려를 싹 걷어내고 문화재청 안팎에서 일 잘하고 사람 좋은 청장으로 신망을 얻고 있다. 내부에선 문화재청의 위상 제고 및 공정한 인사와 명확한 관리로, 외부에선 폭 넓은 소통과 협업으로 얻어낸 평가와 신뢰다. 정 청장의 이런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버지는 마음만 한없이 좋은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생활밀착형이셨지요. 아버지에게 선량함을, 어머니에게 성실함과 독립심을 물려받았어요. 시어머니도 든든한 지원군이셨어요. 여성도 포부를 가져야 한다며 아이들(아들 딸)을 돌봐 주셨어요. 사는 내내 ‘여성이라서’라는 생각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정 청장 경력의 대부분은 기자다. 대학 시절 학보사(고대신문) 기자로 시작, 월간 ‘미술세계’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그때 만난 미술사학자 송미숙 교수를 좇아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평화신문을 거쳐 서울경제신문과 한겨레신문, 중앙일보에서 일하는 동안 문화전문기자 특히 미술기자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래서인가. 그는 내숭과는 거리가 멀다. 짧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시원시원한 어투와 솔직한 태도. 직설적이지만 긍정적이고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 반면 일에선 정확하고 꼼꼼하다. 몸에 밴 기자정신 덕인지 핵심 파악에 능하다. 술을 즐기지만 흐트러지는 법은 없다. 이런 그를 주변에선 ‘디테일에도 강한 장부’라고들 한다.

“취임사에서 말했어요. 여러분은 전문가다. 믿는다. 각자 자기 일을 하시라. 나는 여러분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겠다. 조율과 홍보 등 대외 업무에 힘쓰겠다. 사실 내부 일은 김현모 차장께서 많이 합니다. 정통 관료로 실무에 능통하니까요. ”

말에 그치지 않았다. 정 청장은 취임 후 문화재청의 바람막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보수공사에 대한 감사원 결과가 ‘부적정’으로 나오자 그는 전전긍긍하기보다 사실 규명에 나섰다. 문화재 보수라고 해서 옛것만 고집할 순 없으며, 석탑 내부의 적심과 충전재에 현대의 재료와 기술을 사용한 것은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 확보와 역사적 가치 보존을 고려해 선택한 최선책이었다고 당당히 밝힌 것이다. 이후 그를 바라보는 문화재청 내부의 시선이 확 달라졌다고.

ⓒ문화재청
 정재숙 문화재청장 ⓒ문화재청

업무영역 방대 육해공 아울러 / 전문가 존중, 문화재 활용에 방점

예산 증액과 기구 확장, 인원 증가에도 주력했다. 2019년 궁능유적본부를 출범시킨 데 이어 문화재청 사상 처음 1조원 넘는 예산을 따냈다. 올해 예산은 1조911억원으로 당초 정부안보다 275억원이나 많은 액수다.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이 중요하다는데 재정 당국과 국회 관계자들이 공감한 결과”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엔 청장의 남다른 열정과 노력이 한 몫 했을 게 틀림없다.

“문화재청장은 사실 옛날로 치면 능참봉이에요. 지금은 청의 업무 자체가 방대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육해공을 다 아우른다고 합니다. 땅 위는 물론 땅 밑이나 바다 속 문화재 발굴과 보존은 물론 홍보․전시․활용 및 교육까지 담당하니까요.”

그 많은 업무를 어떻게 감당하고 처리할까. 그의 좌우명은 ‘존구자명(存久自明)’이다. 누가 뭐라는가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 언젠간 모두 알게 될 것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그는 일희일비 없이 매사 공정하고 투명하게 처리하고, 전문가와 실무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책상머리가 아닌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일단 어디든 갑니다. 앉아서 보고 받는 것과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건 확연히 다르니까요. 지난 1월 국립익산박물관 개관식에 갔을 때도 들어서는 순간 백제 무왕의 발걸음이 느껴졌어요. 인사말에 그 느낌을 더했더니 참석자들이 공감하더군요. 보고만 받으면 누가 질문할 때 제대로 답하기도 어렵구요. 현장을 열심히 찾다 보니 국회의원들로부터 지역구에 다녀 갔느냐는 인사도 많이 받습니다.”

정 청장이 취임 후 특별히 방점을 두는 일은 문화재의 ‘활용’과 ‘홍보’다. 문화재 보존은 관심에서 출발하는 만큼, 보존 못지 않게 활용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보존의 첫걸음은 관심이요, 그걸 끌어내자면 국민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들고 알리는 게 관건이라고 믿는다. 활용과 홍보를 바탕으로 문화재와 주변 경관, 지역 사업을 연계하면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경제의 성장동력이 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  ⓒ문화재청
정재숙 문화재청장  ⓒ문화재청

“지난해 궁능유적본부 출범 이후 궁능(4대궁, 종묘, 조선왕릉) 관람객 수가 1,334만명으로 전년 대비 17.8%나 늘었어요. 공개하지 않았던 곳의 문을 열고, 창덕궁 달빛기행 등 야간관람 횟수를 늘리고 테미형숲길을 조성한 데 따른 성과에요. 어디든 사람의 온기가 더해져야 밝고 활기찬 곳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엔 전국에 테마별 관광지인 ‘한국문화유산의 길 7개 코스’를 내놨다. ‘왕가의 길’(서울·경기), ‘천년 정신의 길’(경주·안동), ‘백제 고도의 길’(공주·부여·익산), ‘소릿길’(전북·전남), ‘설화와 자연의 길’(제주) 등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국민의 심신을 치유하고 내수관광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비대면 시대를 맞아 사물인터넷(IoT) 등 디지털기술 활용 콘텐츠 개발과 보급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일제 강점기에 소실된 ‘돈의문’을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 기술로 복원·재현한 데 이어 올해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한양도성 600년의 문화유산들을 담은 ‘한양도성 타임머신 프로젝트’ 사업을 추진 중이다.

명주 짜는 소리나 고택·산사의 고즈넉한 바람소리를 담은 ‘문화유산 마음치유 콘텐츠(ASMR)를 만들어 유튜브(문화유산채널)에 올리고, 고궁의 밤풍경을 담은 사진전을 다음(포털사이트) 갤러리에서 열어 젊은층을 포함한 전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K팝같은 한류콘텐츠로 키워야... 여성도 욕먹고 오물 쓸 각오 필요

“유·무형 유산 모두 K팝같은 한류문화 콘텐츠로 육성하고 싶어요. 유형 문화재는 배경 삼고, 무형문화재는 K팝스타와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콘텐츠로 만들 수 있어요. 패션과 웹툰, 애니메이션과 융합해도 문화유산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테구요.”

정 청장은 자기관리에도 철저하다. 업무추진비를 거의 안 써서 남은 예산 1500만원을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기부했을 정도다.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화 내는 법이 없다”는 평을 듣지만 성추행 등 비리나 부정엔 단호하다.

정재숙 문화재청장 고대 제철기술 복원을 위해 건립한 ‘제철기술 복원실험장’ 준공식 참석 모습<strong>  ⓒ문화재청</strong> <br>
정재숙 문화재청장 고대 제철기술 복원을 위해 건립한 ‘제철기술 복원실험장’ 준공식 참석 모습  ⓒ문화재청 

‘문화란 그것이 생성된 시대와 사회의 슬픔과 감성에 취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정 청장의 희망사항은 문화재청의 국가유산부 승격이다. “프랑스나 영국엔 국가유산부가 있어요. 국가경제 규모나 문화재 활용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우리도 문화재청 업무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국악원을 더해 국가유산부로 승격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전세계에 K문화재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취임 후 문화재청 사상 처음으로 창경궁 소장, 국립무형유산원 원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등 고위직에 여성을 임명한 정 청장. 남녀 구분 없이 일 중심으로 공정하게 평가한 결과라는 설명과 함께 덧붙인 한 마디의 여운이 길다. “여성도 때론 욕 먹고 오물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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