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W초대석-리더십탐구]
김재연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부학장(전 KBS PD)
좌고우면 않고 도전, 용기·열정·호기심으로 실험 혁신 거듭

방송PD는 10~20대의 최애 직업 중 하나다. 부모는 자식의 희망 직업으로 공무원· 의사 ·약사 등을 꼽은 반면, 중학~대학생 자녀는 PD· 디자이너· 수의사 순으로 답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잡코리아&알바몬). PD, 특히 교양PD는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전공생의 취업 선호도 1위다.

김재연 남예종예술전문실용학교 부학장(전 KBS PD)은 교양PD계의 전설로 불린다.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 ’도전 지구탐험대‘ ‘신화창조의 비밀’ ‘다큐멘터리 3일’ ‘연예가 중계’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창시자요, 교양과 쇼를 접목시킨 ‘쇼양’이란 새 영역의 개척자로도 유명하다.

김 부학장은 자신의 ‘끼’에 집안 내력도 한 몫 한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독립신문 주필(김상범)이셨어요.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보건사회부 차관, 김학묵)이셨지만 고등학교 때 문학반이었고 젊은 시절 경성방송국 초대아나운서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노래 솜씨가 일품이셨지요.” 사극 연출의 거장 고(故) 김재형 감독은 맏형이다.

유전자 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형인 김재형 PD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말한다. “중학교 3학년 때 방송국에서 드라마 촬영 현장을 봤는데 형이 유명 탤런트에게 호령하는 거에요. 그 때 나도 PD가 돼야지 하고 마음 먹었지요.”

김재연 피디 ⓒ홍수형 기자
김재연 피디 ⓒ홍수형 기자

집안반대 무릅쓰고 연극영화과 진학, 대학원 중퇴 후 EBS 공채 1기 입사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의 원래 꿈은 연극인이었다. 대학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선택했지만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고 큰형도 결사 반대했다.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라고 하셨어요. 아들 둘이 딴따라가 되는 걸 볼 수 없다구요. 형님은 옥상에서 몽둥이찜질을 했구요. 아버지가 아나운서를 그만둔 이유가 판소리 명창을 여사라고 소개해서였답니다. 기생에게 존칭을 썼다고 문제를 삼았다는 거에요.”

아버지는 그때 겪은 방송계의 부조리를, 형은 연예계 종사자의 어려움을 그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고. 그는 그러나 연극을 고집했고 인정도 받았다. 1973년 스페인 작가 페르난도 아라발의 실험극 ‘기도’가 이화여대생들이 뽑은 최고의 연극으로 선정됐고, 전국대학연극제에서 ‘배비장전’으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인생의 전환은 엉뚱하게 이뤄졌다. 대학원 조교 시절 수험생에게 시험장소를 잘못 가르쳐줬다는 누명을 쓰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 “분명 제대로 가르쳐줬어요 학생이 잘못 찾아간 건데 제가 뒤집어쓴 겁니다. 인생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어요. 허탈감으로 연극에 대한 의욕도 사그라들었구요. 중3 때 생각했던 PD로 방향을 틀었어요.”

1978년 EBS 공채 1기로 입사했고, 1980년 언론통폐합 때 KBS로 이적했다. 드라마PD를 원했지만 형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시사교양과 드라마를 접목한 한국 최초의 토크드라마, 다큐에 예능을 더한 김재연표 다큐(인포)테인먼트가 탄생한 계기였다.

1990년대만 해도 보도· 교양· 예능이 비교적 엄정하게 구분됐지만 김재연 PD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았다. 필요하면 어떤 장르든 섞고 틀과 표현방법을 버무렸다. 교양 바탕에 예능적 감각을 더한 ‘체험 삶의 현장’, 리얼버라이어티의 효시가 된 ‘도전! 지구탐험대’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1993년 시작된 ‘체험 삶의 현장’은 유명인사나 연예인들이 노동 현장에서 땀 흘리며 삶의 의미를 찾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누구든 ‘대강’ 하는 것을 넘어가지 않았다. ‘반쯤 죽는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 세계 곳곳 오지에서 1주일동안 생존해내는 ‘도전! 지구탐험대’는 제작비가 드라마에 맞먹는 수준이었지만 높은 시청률 덕에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장장 501회나 계속됐다.

‘도전! 지구탐험대’ 다큐테인먼트 효시, ‘폭소대작전’으로 시청률 31.4%까지

“‘도전! 지구탐험대’는 정규프로그램의 5배에 달하는 엄청난 제작비와 위험을 무릅써야 했는데 안국정 당시 KBS본부장과 홍두표 사장의 지원으로 계속할 수 있었어요. 이 프로그램으로 ABU(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연예오락부문 대상을 수상했어요.”

그는 또 교양PD로 ‘폭소대작전’을 기획해 코미디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코미디는 스튜디오 위주의 콩트가 일반적이었는데 그는 드라마 미니시리즈 개념의 야외물 코너를 만들었다. ‘덩크 5’가 그것. 야외물은 비용과 품이 스튜디오 제작과 비교할 수 없었던 만큼 제작비를 아끼려 무명 개그맨을 캐스팅했다. 유재석· 송은이· 이창명 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결과는 30%가 넘는 시청률로 나타났다.

김재연 PD는 이처럼 새로운 시도와 도전, 실험의 아이콘이었다. 이거다 싶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대들었다. 열심히 일한 기업인들의 성공신화를 다룬 ‘신화창조의 비밀’, 동물의 다큐영상과 정보를 스튜디오의 오락적 퀴즈와 혼합한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모두 엉뚱한 발상과 호기심, 특유의 돌파력으로 새로운 형식에 도전해 성공한 프로그램들이다. ‘신화창조의 비밀’에선 다큐프로그램 최초로 주제가(전인권 편곡 들국화 ‘행진’)를 사용했다.

기존에 없던 포맷을 만들고 ‘실패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얘기를 듣는 그에게도 아픈 기억은 있다. “‘다큐 3일’ 중 ‘고물상 할머니’ 편이었어요. 길에서 고물을 주워 팔던 할머니를 다뤘는데 알고 보니 사실과 달랐어요. 실수로 치부하기엔 가족의 상처와 피해가 너무 컸어요. 저 역시 리얼리티를 사명으로 해온 경력이 몽땅 가짜로 치부되는 듯해 고통스러웠구요.”

‘현장기록 요즘 사람들’에서 다룬 동두천 기지촌 전도사 이야기도 두고두고 뼈 아픈 경험이 됐다. 촬영 막바지에서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일정 상 그대로 방송했는데 오랫동안 언론윤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이 일로 다신 휴먼다큐를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어요.”

김재연 피디 ⓒ홍수형 기자
김재연 피디 ⓒ홍수형 기자

창의성· 자기색깔 하루 아침에 안생겨, 인문학 소양 함양·융합해야 새로움 창출

KBS를 정년 퇴직한 후에도 그는 줄곧 바쁘게 살았다. 2019년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부학장으로 부임, 후진 양성과 사회교육에 힘쓰는 그의 남은 소망은 ‘연극인’으로 사는 것이다. “후회나 회한은 없어요. 출세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원래 행정직엔 관심이 없었어요. KBS에서 마음껏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었구요. 소망은 어렸을 때 꿈이었던 연극을 다시 해보는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방송프로그램도 제작하구요.”교양PD의 전설, 다큐테인먼트의 창시자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는 김재연 PD. 좋은 PD가 되려면 ‘도전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라’고 말한다. 평생 독서는 물론 연극· 뮤지컬· 영화 등 공연예술 감상과 전시회 관람 등 인문학적 소양 함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그의 한 마디는 울림이 크다. “어느 날 갑자기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순 없어요. 자기만의 색깔도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구요. 기본 소양이 갖춰져야 그것들이 융합돼 새로움을 창출할 수 있어요.”

김재연 부학장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1978년 EBS 1기 공채 입사. 1980년 KBS 이적. KBS 교양국 부장,국장. KBSN 임원. KBS어린이방송 사장, JTBC 부장. 현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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