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제21대 대선 특별기획] 2030 여성 유권자 리포트 ③스텔스 페미니즘
2030 여성 59.8% ‘조용한 페미니즘 지지자’
온라인 공격과 직장 불이익 피해 우려 상당
“정치권의 페미니즘 ‘입틀막’…표로 증명해야”

2030 여성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 은폐 전략을 택한 것이다. 여성신문이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2030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59.8%)이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밝혔다.ⓒHaJung
2030 여성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 은폐 전략을 택한 것이다. 여성신문이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2030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59.8%)이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밝혔다.ⓒHaJung

“주위에 제가 페미니스트라는 걸 말하지 않아요. 공격을 받고 싶지 않거든요.”

25살 김가영(가명) 씨는 성평등 집회에 참여하고 여성학 책도 꾸준히 읽지만, 주위에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영 씨만의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 백래시(backlash·반동)로 인해, 2030 여성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조용한 페미니즘 지지자’가 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페미니스트인 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들의 정치적 판단 기준엔 여전히 ‘성평등’이 중요한 의제로 존재하고 있다. 

2030 여성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페미니즘 가치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 은폐 전략을 택한 것이다. 여성신문이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2030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59.8%)이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중 46.8%는 “젠더 평등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건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스텔스 페미니즘(항공기가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군사용 은폐기술 ‘스텔스’와 페미니즘을 결합한 합성어)’ 현상이다.

이는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 20대 여성의 절반가량(48.9%)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응답했던 것과 비교해 뚜렷한 변화다. 전문가들은 “사회 전반에 걸친 백래시(backlash·반동)”가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2022년 경남대 에브리타임에 페미니즘 동아리 ‘행페’ 신입부원 모집 홍보물을 떼다 쓰레기통에 버린 글이 올라왔다. ⓒ아우르니
2022년 경남대 에브리타임에 페미니즘 동아리 ‘행페’ 신입부원 모집 홍보물을 떼다 쓰레기통에 버린 글이 올라왔다. ⓒ아우르니

“너 페미야?”…온·오프 넘나든 공격

지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재시동)'가 된 이후 페미니스트를 향한 공격은 온라인 공격에서 시작해 현실로 확장됐다. 2015년 이후 대학 내 페미니즘 동아리는 지속적인 조롱을 받았고, 홍보물이 찢기는 일 역시 일상이었다. 연예인·운동선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8년 아이돌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히자 일부 남성 팬은 아이린이 “페미 인증”을 했다며 포토카드를 찢고 불태웠다. 2020년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도 짧은 머리, 여대 재학 등을 이유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로 지목되며 사이버 불링의 대상이 됐다.

페미니스트를 향한 공격은 실제 피해로 이어졌다. 2016년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된 성우를 넥슨이 계약 해지한 사건을 시작으로 게임계의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4개월간 페미니즘 사유로 인한 부당해고 또는 계약해지 사례는 7건, 입사 취소 사례는 14건에 달했다.

지난해 11월 4일 경남 진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20대 남성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20대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 폭행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4일 경남 진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20대 남성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20대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 폭행했다. ⓒ연합뉴스

2023년 진주에선 편의점 여성 직원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며 무차별 폭행을 당해 청력을 잃었다. 올해 2월 이화여대에 열린 윤석열 탄핵 찬반 집회 현장에는 신남성연대 등 극우 유튜버가 난입해 "너 페미냐?"며 학생의 피켓을 빼앗고 멱살을 잡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약 10년간 이어진 페미니스트를 향한 공격에 여성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게 됐다. 설문조사 응답자의 81.8%는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면 온라인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고 했고, 70.5%는 “직장에서 불이익이 우려된다”고 답했다.

박수진 법무법인 혜석 변호사는 “젠더 평등 가치는 여전히 지지받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사회적 갈등 속에서 여성들이 선택한 방어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 청계천을 걷고 있는 여성들ⓒ손상민 사진기자
서울 종로구 청계천을 걷고 있는 여성들ⓒ손상민 사진기자

내부도 피로감…“페미니즘 교육 필요해”

여성들이 페미니스트인 것을 드러내지 않은 원인은 백래시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나언(28) 씨는 여성단체를 후원하고 집회에도 꾸준히 참여하지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싸우는 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교수는 “페미니즘은 낙인이 됐다”며 “여성들 안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갈등이 지속되며 페미니즘이 ‘피곤한 주장’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페미니즘은 본래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민주주의 운동이지만, 오랜 시간 왜곡과 낙인을 통해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로 남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해법으로 ‘교육’을 꼽았다. 신 교수는 “페미니즘을 서로 다르게 이해해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법은 단순하다”며 “초·중·고교에서 민주주의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페미니즘이 소수자 학문이라는 것을 조망하며,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집단적이고 가시적으로 행동해라”

신 교수는 ‘스텔스 페미니즘’ 현상은 성불평등을 공고히 유지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이제는 직접적인 차별이 아니라 ‘네가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간접적 위협이 주효하게 작동한다는 점이 문제”라며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며 입을 틀어막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억압이야말로 한국의 사회 성차별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정치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신 교수는 “전략을 짜서 집단적이고 가시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며 “이제 새 정부가 출범한다. 여성 유권자들이 성차별 해소를 공약하는 후보에게 힘을 실어줄 때, ‘입틀막’ 정치에 균열을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희연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역시 “윤석열 정부는 안티페미니즘 세력을 기반으로 이러한 분위기를 가속화시켰지만, 지금의 상황은 단절된 현상이 아니라 축적된 두려움의 결과”라며“광장을 떠난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에서 위협에 노출돼 있다. 중요한 것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가 이에 응답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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