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한국여성정치연구소 35년 이끈
손봉숙 이사장·김은주 소장
‘여성의 정치세력화’ 목표로 창립
후보자·보좌진 교육 등 역할

22대 총선에서 역대 가장 많은 60명(전체 20%)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며 국회에 발을 들였다. 12·3계엄 이후 2030여성들은 응원봉을 들고 광장을 열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고, 이들은 광장에서 ‘성평등없이 민주주의는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탄핵 정국이 길어지자 ‘응원봉을 든 여성이 만든 광장’은 ‘응원봉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정치권에선 다시 여성의제가 사라지고 있다.
“보수 정당은 안티페미니즘에 편승해 여성 의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고, 진보 정당은 여성 유권자를 이미 잡은 ‘집토끼’로 간주한 채 굳이 여성의제를 꺼내지 않는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청년이라는 이름에 포섭되지 말고 여성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호명하며 자신들의 대표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는 1990년 3월 9일, ‘여성 없는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설립됐다. ‘여성 정치’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부터 여성의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왔다. 국회 여성보좌진 아카데미, 차세대 여성 리더십 교육, 결혼이주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 정당의 성인지 전략 도입 등 지난 35년간 남성 중심 정치의 균열을 만들어온 현장에는 늘 여성정치연구소가 있었다.
지난 1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 자리한 연구소 사무실에서 손봉숙 이사장(제17대 국회의원)과 김은주 소장을 만났다. 지난 35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왜 지금 여성정치가 사라졌는지, 여성정치가 떠오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 올해로 35주년을 맞았다. 1990년 3월 창립 당시의 문제의식은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
손봉숙=“당시에도 여성 정치인은 있었지만,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또 정계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았다. 공천권을 가진 당대표나 지도부와 친밀한 소수의 여성만이 가능했다. 여성 유권자들도 여성 정치인의 필요성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여성의 정치세력화’였다. 물론 처음부터 당선이라는 결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여성후보자들을 발굴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여성들 스스로가 정치적 주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초기 10년간은 지방자치단체 부활과 맞물려 여성들이 풀뿌리 민주주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교육했다. 이후에는 이주여성, 탈북여성, 청년 여성에 대한 시민교육 정치참여 교육을 이어왔다. 창립할 때 만들었던 정관의 목표를 시대적 배경과 요구에 맞춰서 35년간 이어 왔고, 제일 중요한 건 여성지도자 발굴이었다. 그렇게 여성지도자들을 발굴해서, 지방의회에서 국회로 배출시켜왔다.”

-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핵심 목표였다. 22대 여성국회의원 비율은 20% 역대 국회에서 가장 많다. 하지만 ‘여성 정치’가 사라졌다는 평도 있다. 여성 의원의 숫자가 늘어도 여성 정치가 대두되지 않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단하는가?
손= “국회에 첫 날 들어가면, 4년 후에도 들어가는 걸 목표로 하게 된다. 다음에도 공천을 받기 위해서는 당에 충실하고 잘 보여야 한다. 결국 여성들이 국회에 들어가도 당에 충성해서, 다시 살아남아 국회에 들어가는 것만을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여성의제에 대해서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우리 당이 먼저 여성의제를 선점하자는 움직임들이 사라졌다.”
김은주= “20%는 상당히 의미 있는 숫자다. 하지만 정부수립 후 70년이란 시간을 대비하면 여전히 적다. 페미니즘 정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라는 토양 위에서 꽃 피울 수 있다. 1980~1990년대를 이끌었던 학생운동이 사라진 이후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페미니즘 정치밖에 없었다. 현재에는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위한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라는 측면에서 여성 정치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게 1차적 목표지만, 이 여성들이 페미니스트여야 하고 민주주의자여야 한다. 여성 의원들 숫자는 늘었는데, 실질적으로 여성들을 대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 여성의 대표자가 아니라 당에 충성하는 여성당원으로 전락해버린다. 공천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의원 개별적인 노력과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이 사람들을 민주주의자로, 페미니스트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당으로 하여금 공정한 공천시스템을 만들고 정치제도를 개혁하도록 압박해야 하고 또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 정치인과 여성단체간의 더 단단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 말씀처럼 과거 국회에서는 여성의원들이 당이 달라도 여성의제에서는 초당적 협력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초당적 분위기가 사라졌다.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김=“이런 현상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지난 30년간 한국 정치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비롯됐다. 정치 지형이 보수-진보로 극단적으로 양극화됐다. 특히 2021년 서울·부산 재보궐선거와 대선을 거치고 지난 대선에서 당시 윤석열 후보가 ‘여가부폐지’를 들고 나온 후 정치 지형은 성별로 나뉘었다. 2030 남성은 보수로 기울었고, 여성은 진보를 지지하면서 유권자층이 극명히 분리됐다.
과거에는 보수든 진보든 선거 때가 되면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여성 의제를 앞다퉈 다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유권자 스스로 정치 성향에 따라 갈라지면서, 여성 의제가 ‘표가 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보수 정당은 안티페미니즘에 편승해 여성 의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고, 진보 정당은 여성 유권자를 ‘집토끼’로 간주한 채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2030 남성의 표를 의식해서 여성 의제를 꺼내지 않는다.

여성의원들이 여성의제를 꺼내고 싶어도 당내에서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성의제를 꺼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시대가 된 것이다. 단순히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조차 정치에서 배제된다면, 노동자·장애인·청년 같은 다양한 소수자들은 더 말할 수 없게 된다.
정의당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의당은 2004년 처음 원내 진입해서 20여년간 사회적 약자와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정당이었고, 소수자 관련 입법에 있어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제 정의당조차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이는 민주당 내에서도 여성을 말하지 못하는 상황과 연동되어 있다. 여성 정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다. 지금 이 상황은 다양성을 거부하는 구조적 경고이며,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고 돌파해야 할 문제다.”

- 탄핵 국면을 맞아, 2030 여성들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지만, 정치권은 여성의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정치권이 2030 여성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김=“여성이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호명해야 한다. 지금처럼 여성이라는 단어조차 정치에서 회피되는 상황에서는, 정당이 스스로 여성 청년을 주체로 인식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2030 여성들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호명하며 자신들의 대표성을 요구해야 한다. 정치권은 ‘청년’이라는 말로 모든 걸 포괄하려고 하겠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지워지는 순간, 누구도 여성이라는 존재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고민하지 않는다. 스스로라도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정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2030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구체화하고 정당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당이 알아서 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여성 스스로 ‘여성 정치’를 요구하는 존재로 다시 나서야 한다.”

- 한국정치연구소는 여성할당제 도입에 기여했다. 소장님은 여성할당제를 넘어 동수 정치를 강조하고 있다. 동수 정치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무엇인가.
김=“남녀동수제는 수적인 의미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다. 여성할당제는 말하자면 적극적 조치다. 여성들이 정치 영역에서 차별이나 불평등을 받아 왔기 때문에 여성에게 할당이라는 우대조치를 통해 그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의미이다.
동수는 완전 다른 의미다. 50대50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법에 복종하는 이가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법에 복종하는 이의 절반은 여성이다.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인간 종의 절반이자 주권을 가진 시민의 절반을 구성한다. 따라서 대표되는 시민의 절반이 여성이듯 대표하는 자의 절반도 여성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50대 50은 여성이 차별받은 만큼의 몫이 아닌 헌법 제1조에서 천명한 민주공화국를 운영하는 대의제의 원칙으로 여성에게 당연하게 부여돼야 하는 권리의 크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무엇인가?
김=“먼저, 남녀동수제다. 개헌 운동을 통해서 헌법 안에 정당의 책무 혹은 국가 정체성의 하나로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여성 정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제도를 철저하게 성평등의 관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재점검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정치개혁 운동을 전개하는데 역점을 둬야 할 것 같다.
또, 한국의 평화, 민주주의만 위태로운 것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여성들이 공동의 연대를 하고 민주주의 운동을 해나갈 수 있는 네트워크 구축을 해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