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문 연 고용평등상담실
여성노동자의 마지막 보루
성차별·성희롱 대응 공간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수진 기자
지난 9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고용노동부의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삭감을 규탄하고 있다. ⓒ이수진 기자

1970년대 노동운동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열었다면, 그 정점에는 70년대 후반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오랫동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를 당하던 20대 초반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외국계 자본과 기업에 맞서 조직적으로 대항했다. 독재정권하에서 억눌렸던 민주적 노동운동은 당시 사회적으로 연약한 존재로 여겨지던 여성노동자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했다. 똥물 투척에도 분연히 싸웠던 동일방직이나, 위장폐업 회사에 맞서 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했던 YH사건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면서 성장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언급조차 하지 못했던 노동권 보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고조시켰다. 또한 야당 당사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김경숙 열사가 사망하자, 대다수 사람들은 기본 인권조차 무자비하게 짓밟는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결국 YH 사건은 유신독재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되었다.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명목적으로는 섬유, 의류, 방직, 고무 등 경공업 산업의 쇠퇴나 대단위 노동운동의 등장과 함께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여성에게 행해지는 각종 사회적 성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으로 발전되어왔다. 80년대 결혼퇴직제나 조기정년제 철폐 투쟁이나, 남녀고용평등법 요구,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생겨난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등을 위시한 많은 여성단체의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활동은 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더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했으며, 여성이 시민으로서, 노동자로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성평등을 완전하게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차별은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정부에서도 2000년부터 여성노동자가 일터에서 경험하는 성차별 상담창구로서 고용평등상담실을 개설하고 이에 대한 예산을 지원해왔다. 고용평등상담실은 여성운동단체가 여성권리 증진에 진심인 노동 및 법률 전문가들과 팀을 꾸려 고용상 차별이나 성희롱 등으로 고통을 받는 여성노동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민간 여성노동 상담창구 역할을 하면서 지난 20년간 성장해왔다. 고용평등상담실은 비정규직, 계약직, 시간제, 특수고용과 같이 회사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여성노동자들이 기댈 언덕이자 보루였다. 그런데 현 정부는 실효성을 이유로 예산을 절반 수준 이하로 삭감하고, 고용평등상담실에 대한 지원을 없애고 고용노동부지청에서 담당관을 채용하여 상담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얼핏 보기에는 제도권안에서 여성노동자 차별을 대처하겠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22년 기준 1만3198건이나 접수된 차별상담을 개별화된 상담원들이 수행할 수 있을까 싶다. 또 기업이나 조직 내 취약한 지위에 있는 여성노동자들, 그중에서도 비정규계약직, 시간제, 특수 고용 형태의 여성노동자들이 지역노동청에 진정 접수의 방식으로 전환했을 때 과연 주저함 없이 문을 두드릴 수 있을까 싶다.

지난하기는 했지만 여성노동자들은 애매하고 교묘한 성차별과 성희롱 등에 맞설 수 있는 공간을 통해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어냈다. 그런 점에서 성차별에 물러서지 않고 함께 대책을 강구하는 민간상담창구 공간은 노동조합처럼 보장받아야 할 여성노동자 권리이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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