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개 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항의
관련 예산 12억→5억으로 반토막
민간위탁 종료하고 직접운영으로
“전국 8명, 밀착지원 되겠나” 비판

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각지대 여성노동자들의 최후의 보루를 빼앗지 말라”고 외쳤다. ⓒ이수진 기자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각지대 여성노동자들의 최후의 보루를 빼앗지 말라”고 외쳤다. ⓒ이수진 기자

고용노동부가 24년간 직장 내 성희롱 등 피해자들을 밀착 지원해 온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예산을 삭감하고, 규모를 대폭 축소해 자체적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상담실을 운영해 온 여성단체는 “사각지대 여성노동자들의 최후의 보루를 빼앗지 말라”고 규탄했다.

고용평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등 19개 여성단체(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외쳤다.

앞서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고용노동부 2024년도 예산안에서 고용평등상담실 예산은 12억에서 5억으로 절반 이상 삭감됐다. 고용부는 민간위탁을 종료하고 8개 지청에 각 1명씩 자체 상담사를 배치해 창구를 단일화하고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방침이다.

고용평등상담실은 민간단체가 고용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해온 여성노동자를 위한 전문고충상담실실로, 지난 2000년 개소해 현재까지 전국 19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24년간 적극 문제 해결에 나서 피해를 구제하고 법제도를 바꾸는 역할까지 도맡아왔다.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은 개소 이후 총 16만8090건, 연평균 7640건의 상담을 진행해온 전문적인 노하우를 가진 운영기관이다. 운영단체들은 여성노동자들이 복잡한 성차별적 노동환경에 처해있어 일반 상담기관에서는 양질의 상담을 받기 어렵다며,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삭감된 예산과 위탁 종료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단체들은 “적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고용평등상담실 소속 상담원들은 열악한 처우를 견뎌가며 여성노동자의 곁에 있다는 사명감으로 활동해왔다”며 “(고용부는) 심지어 고용평등상담실 운영 주체들에게 (폐지) 과정과 이유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성인지적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잘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법에 명시된 내용이라 하더라도 이를 차별로 인식하기 어렵다”며 “이런 현실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복잡한 문제를 안고 다른 상담실이나 고용노동부를 찾아가면 법 적용이 안 된다며 돌려보내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용노동부의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삭감과 민간위탁 일방 종료에 대해 비판했다. 사진은 폐기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사업을 표현한 피켓을 든 활동가의 모습. ⓒ이수진 기자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용노동부의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삭감과 민간위탁 일방 종료에 대해 비판했다. 사진은 폐기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사업을 표현한 피켓의 모습. ⓒ이수진 기자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그동안 공적 시스템의 공백을 발견하고 메우면서 공적 시스템의 개선을 견인해 온 곳이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이라며 “결국 고용평등상담실 폐지는 실효성을 명분으로 귀찮고 피곤한 존재를 없애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에 내담했던 여성노동자들 중에는 국선변호사조차 사건 수임을 포기하거나, 고용노동부 진정을 넣었으나 사건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아 구제받지 못한 사례들이 있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입었던 A씨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지만 미비한 조사로 사건이 해결되지 못하고 종결될 위기에 처하자 안산여성노동자회 고용평등상담실을 찾았다.

A씨는 “상담 선생님께서는 많은 자료와 의문점이 되는 부분을 찾고,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건의 잘못된 점과 법을 위반한 점을 알아봐주셨다”며 “그로 인해 사건은 다시 재조사됐고 증언들도 사실로 인정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제서야 회사도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문제를 바로잡으려 했고 가해자는 피해자들과 분리돼 현재는 다른 공장으로 발령난 상태다”며 “만약 고용평등상담실이 없었다면 저는 억울하고 답답한 채로 일자리도 없고 권리도 구제받지 못한 상태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수진 기자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수진 기자

고용평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는 대구여성회 김예민 대표는 “고용평등상담실에서 맡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사건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며 “사람이 있고, 피해 입은 상처가 있고, 성차별에 기반한 많은 사건들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상담실을 두고 ‘최후의 보루’라고 하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며 “시민들이 노동현장에서 겪고 있는 각종 성차별과 성희롱 등에 전문적으로 상담하고 지원할 수 있는 기관은 고평상담실이 유일하다. 축소 폐지할 게 아니라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불안정한 피해자를 위한 동행이나 법원 모니터링 등 내담자들을 심층지원하고 있는 대전여민회 김예주 상담활동가는 “상담원들의 노력을 알고 있다면 ‘연계협업’ 따위의 말로 고평상담실을 축소하는 기획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연계협업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은 훨씬 나아졌어야만 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지워버린 숫자들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에 겨우 건져올려진 사람들이다”며 “지금 고용노동부가 해야할 일은 많은 노동자들이 건네는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도록 소통 창구를 오히려 늘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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