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생 김지영①] 다 타버린 여성들…그래도 ‘페미니즘’
[92년생 김지영①] 다 타버린 여성들…그래도 ‘페미니즘’
  • 이하나, 진혜민, 김서현, 전성운 기자
  • 승인 2020.12.31 15:25
  • 수정 2021-01-07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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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이 2021년 신년 기획 <92년생 김지영>을 통해 이 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싣습니다. 82년생, 92년생, 00년생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젠더갈등’이라는 이름 아래 그동안 '한국형 백래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주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노력해야 할 방안 등을 살펴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 백래시(Backlash)는 어떠한 아이디어, 행동 또는 물체에 대한 강한 반발을 뜻하는 단어로, 성평등 및 젠더 운동 등의 흐름에 반대하는 운동 및 세력을 ‘백래시’라 부른다. (출처 : 위키백과)

여성신문 기획기사 '92년생 김지영'은 [인터랙티브형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거나 URL에 복사해 붙여 넣어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92kim.womennews.co.kr/

ⓒ뉴시스

“저는 단 한 명의 여성도 구하지 못할 거 같아요.”

2019년 겨울, 여성 연예인 설리와 구하라가 안타깝게 목숨을 끊었을 때 열린 추모제에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한 여성이 고백하듯 말했다. 그는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을 통해 페미니즘을 알았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마치 구원과도 같았다. 살면서 겪은 이상한 일들이 단순히 ‘내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페미니즘을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침을 삼키면서 속으로 삭혀왔던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이것은 문제라고 힘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20대 초중반을 열정적인 페미니스트로 살았다. 거리서명에서부터 집회 참여, 댓글 달기, 페미니즘 관련 상품을 소비하기, 혜화역 시위와 낙태죄 폐지 시위 참여하기.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지쳤다고 느낀다.

“아무리 말을 해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는 말했다.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저에게 방법은 두 가지 뿐이에요. 헬조선을 탈출하든가, 문제를 바꾸기 위해 높은 곳까지 올라가든가.”

 

 

‘페미니즘 리부트(Reboot)’ 대한민국을 뒤흔들다

“넷상에서 여자들이 남자를 정말로 ‘꼼짝 못 하게’ 했던 거의 최초의 시대였죠.”

여성활동가 반디가 메갈리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2015년 일베와 소라넷, 디씨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연달아 여성혐오 사건이 터지면서 여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시점에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메갈리아’가 탄생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과 2015년 일어난 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접속의 지점을 포착’하기 위해 이 시점의 여성운동을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흥분됐어요. 제 생애 그렇게 통쾌한 순간은 처음이었거든요. 메갈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집단 ’직관’이 만들어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약자로서의’ 직관과 논리성이 결집되는 광경은 장엄하고 흥미로웠어요. 흠집 내기 어려운 에너지였죠. 저는 살아생전 그렇게 외연이 빠르게 확장되는 논리전개를 처음 봤어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만연한 여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2016년 강남역 여성 표적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성혐오'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의 글귀가 적힌 수많은 포스트잇이 붙었고,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2018년에는 디지털 성폭력에 대응을 촉구하는 혜화역 시위가 열렸다. 첫 집회 주최 측 추산 1만5000여 명에서 12월 22일 전체 참여자 수 30만 명을 넘긴 한국 여성운동사상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2019년에는 일명 ‘썬학장’이라고 불리는 버닝썬, 김학의, 장자연 사건이 뜨거운 감자였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법적 판단 기준을 만들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는데 여기에 여성들의 공이 컸다.

 

 

 

번아웃 호소하는 여성들…늘어나는 죽음

최근 한국 사회의 성인지감수성을 높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잇따라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트위터 유저의 “많은 페미니스트 활동가 친구들도 ‘탈페미’하거나 번아웃을 호소하고 있다”는 트윗은 많은 리트윗과 공감을 얻었다. 유명 페미니스트 유튜버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외줄이 마침내 끊어졌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A씨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스트 친구들끼리 자주 쓰는 표현 중에 ‘불타서 재만 남았다’ ‘재가 흩날린다’ 이런 표현 많이 써요. 지쳐서.”

B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너무 많이 소진됐어요. 메갈 시기와 많이 비교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여성이 많았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명 한명씩 다 떠나서 이야기를 하는 여자가 안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들이 모여서 이전에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면 신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정치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지치니까.”

여성들의 우울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2020년 국정감사에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우울감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20대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어 여가부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2019년 2030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전년도 대비 6.7% 증가했다. 특히 20대에서 25.5%나 늘었고 30대에서 9.3%, 10대에서 8.8% 증가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10월부터 자살 사망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보아,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일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20년에 들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신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2019~2020년 상반기까지 자살자 수 현황’에 의하면 20대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2019년 상반기 207명에서 2020년 상반기 296명으로 43% 급증했다.

20대 여성의 자살이 늘어난 주요 원인은 ‘코로나 블루(Corona Blue)’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하는,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다. 그러나 젊은 여성의 자살 증가를 코로나19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20대 여성의 자살 사망자 수는 급증하는 추세였기 때문였다.

우려스러운 연구 결과는 예전부터 포착되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발표한 '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적 대응 방안 연구조사'를 살펴보면 청년의 삶의 불안 지수는 상당히 높다. 구직, 낙오, 미래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불안이 기성세대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그런데 성별 간 차이를 보면 청년 세대 중에서도 여성의 불안은 더 크다. 구직, 낙오, 미래 불안도 또래 남성보다 높지만 범죄피해 불안은 월등히 높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일상 속 불평등과 폭력이 코로나로 인해 증폭되면서 여성들의 극단적 선택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이 시대 여성들의 '안부'를 묻다

여성 자살 사망자 수 증가 문제의 적확한 근본 원인을 제시하기에는 여성 자살 사망자 수 급증이 나타난 게 고작 2년 남짓에 불과해 관련 통계 자료나 연구가 아직 부족하다.

여성신문은 약 3개월에 걸쳐 우리 시대 지영이들을 만났다. 82년생, 92년생, 00년생 지영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성 ‘번아웃’과 우울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자살과 우울의 이유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전체를 덮고 있는 불평등과 백래시를 지목하고자 한다.

자산불평등, 불안정노동 등의 사회적 문제는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성들이 힘을 모아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이것을 막으려는 흐름을 마주쳐야 했다. 백래시는 ‘젠더갈등’이나 ‘여성우월주의’ 등의 이름으로 상황에 따라 거죽을 바꿔 쓰며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일상 속 싸움을 막고 있다. 여성들뿐 아니라 ‘90년생 김지훈’의 이야기도 들었다. 지훈이들이 갖고 있는 ‘군대, 여성전용공간, 할당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여다봤다.

여성신문은 2020년 기획기사 <92년생 김지영>을 통해 이 시대 여성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이 기획이 ‘페미니스트로 살기 힘들다’는 00년생 지영이들에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는 92년생 지영이들에게 조그만 용기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인터랙티브 연결 : https://92kim.womennews.co.kr/

※ 본 기획기사와 인터랙티브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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