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법무부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송기헌 의원의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0.09.17. ⓒ뉴시스·여성신문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송기헌 의원의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0.09.17. ⓒ뉴시스·여성신문

요즈음 대한민국의 하루는 추미애로 시작해서 추미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이후를 고민하는 국가 차원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논의는 사라졌다. 전국민 기본소득 논의나 전국민 고용보험 논의 같은 의제들 말이다. 코로나19로 절벽 끝에서 버티고 있는 시민들의 삶은 진실 공방 앞에서 뒷전이 되었다.

정부 여당은 별것도 아닌 일로 국정을 발목 잡는다고 야당을 비난하고, 야당은 어떻게 국기 문란 행위에 눈 감겠냐고 응전했다. 신권력과 구권력의 다툼 과정에서 내부 고발자는 졸지에 범법자로 불렸다. 친여권에게는 조리돌림 당하고, 난데없이 안중근 의사가 싸움 한복판으로 호명되기도 했다. 정권의 돌격대를 자칭하는 한 의원은 이 모든 것이 박근혜 세력의 정치공작이라는 음모론을 들고나왔다. 검찰개혁을 차단하기 위한 기획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조국 전 장관 사건 당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진실을 둘러싼 싸움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때문인지 진실은 오랫동안 인간의 관심거리였고 문학의 단골 소재였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에 초연된 ‘오이디푸스 왕’ 또한 진실을 주제로 한 이야기다. 작품은 테베의 왕인 오이디푸스 일가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을 그려내고 있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일 것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으며 태어난다. 이를 두려워한 그의 아버지이며 테베의 왕인 라이어스는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운명은 오이디푸스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고 신의 저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성됐다. 

이야기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에 퍼진 역병을 해결하기 위해 신탁을 받는다. “라이어스 왕의 살인범이 테베을 떠나야 역병이 멈춘다.” 신탁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살인범을 찾기 위해 눈이 보이지 않는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그때부터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눈 뜬 이들은 모두 모르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예언가만이 오이디푸스가 신탁 속 살인범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씩 밝혀져 가는 진실은 오이디푸스 일가를 파국으로 이끈다.

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인간의 힘으로 감출 수도 없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는 드라마에만 있는 허구가 아니다. 현실 속에도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파국을 막는데 성공한 전례가 많았다.

1974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사퇴한다. 우리가 흔히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르는 미국 행정부가 벌인 불법 도청과 은폐 사건 때문이다. 그는 임기 중에 사퇴한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죽는 날까지 갖고 살았다.

당시 미국 시민들은 대통령이 ‘도청’한 사실보다 닉슨 측이 국가 기관을 동원해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했다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분노했다. 누구보다 공공을 위해 헌신해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기만한 행위야말로 미국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닉슨은 1994년 자신이 죽는 날까지 명예 회복을 위해 애썼지만, 사람들의 냉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Deep Throat’이라는 익명의 인물이 언론에 제보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 제보자의 신원은 2005년이 돼서야 밝혀지는데, 바로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이었다. 사건 조사 기간 내내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했던 연방대법원을 비롯한 국가 기관 덕분에 세계 최강대국 권력자의 범죄를 처벌할 수 있었다. 언론의 본분을 지켜낸 기자와 언론사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품격을 보여주었다고 기록된다.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진실을 지킴으로서 닉슨 개인의 불명예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불명예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닉슨 대통령

최근 나의 입장, 우리의 입장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치부해 버리는 정권의 모습은 실망스럽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태롭다. 시민들의 삶보다는, 차기 서울시장 선거와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태도 아닌가. 지금 정권은 그 누구보다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진실에서 나오는 사람의 지성은 서리도 내리게 하고, 성곽도 무너뜨리며, 금석도 뚫을 수 있다. 하지만 허위로 가득한 사람은 형체만 헛되이 갖추었을 뿐 참됨은 이미 망했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면 얼굴도 밉살스럽고 홀로 있으면 제 모습과 그림자도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채근담의 말이 권력을 쥐고도 권력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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