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파면한 페미니스트 대행진'에서 참여자들이 여성혐오발언이 담긴 현수막을 밟고 지나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손상민 사진기자
'윤석열 파면한 페미니스트 대행진'에서 참여자들이 여성혐오발언이 담긴 현수막을 밟고 지나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손상민 사진기자

공공성을 허물고 시장의 경제 원리에 사회를 내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근대적’ 기능주의 연대 규범은 붕괴했다. 기능주의 규범은 18세기 고전 경제학이 방치한 사회 병리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19세기 사회학자 뒤르켐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는 그를 뛰어넘어 ‘인정’ 또는 ‘차이’에 기초한 사회 연대로 공공성을 탈바꿈하자는 목소리들이 출현했다. 페미니즘 역시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200년 넘게 이어온 ‘공공성’ 논의는 안타깝게도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17세기 홉스의 ‘자연상태’로 역주행하는 고속도로 위에 던져졌다.

이 역주행의 고속도로에는 디지털화라는 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홉스식의 무한 경쟁뿐만 아니라 디지털 세계로의 단절과 디지털 세계 중심의 집합화라는 전혀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생산되고 있다. 그리하여 시장만능주의로 인한 사회적 병리 역시 새로운 고립(‘히키코모리’)과 신자유주의적 집단 혐오주의의 형태를 보인다. 과거 나치즘, 파시즘의 집단 혐오주의는 ‘덜 근대화’된 사회의 특징으로 설명되었으나, 현재의 그것은 ‘가장 근대화’된 사회에서 등장했다. 

구미 사회의 집단 혐오주의 또는 극우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실직한 중장년 남성 가장 육체노동자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디지털화의 진전과 함께 청년 남성들을 포섭하는 중이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한편에서는 ‘태극기부대’로 불린 노년층, 다른 한편에서는 디지털화한 청년 남성 및 일부 청년 여성(‘생물학적 페미니스트’)을 중심으로 결집했기 때문이다. 서구와 달리 한국의 중장년 남성은 오히려 ‘진보 성향’이 강하여, 반대로 그들의 이념적 공격 대상(‘586세대론’)이 되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한국의 집단 혐오주의는 연령 또는 세대의 특성인 듯이 설명되곤 한다. 특히 청년층에서는 성별 차이가 유의미하므로, 필자는 그것을 ‘성x세대 교차성’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관찰 결과를 범주화하는 한도 내에서만 적실하다. 그런 설명이 이론적 설명으로까지 격상된다면, 그것은 특정 세대나 성별에 속하는 개인들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귀속시키는 왜곡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그런 왜곡을 ‘세대갈등’이나 ‘젠더갈등’과 같은 ‘을끼리의 싸움’으로 이미 경험했다. 

물론 개인의 책임이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서로 이해하고 일체감을 가져야 해결되는 문제 역시 아니다. 사회 연대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사고와 행동으로 결집하도록 어떤 불균등한 힘들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의 세대 경험에 들어 있는 어떤 힘일 수도 있고, 종교적 신념일 수도, 경제적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네트워크의 효과일 수도 있고, 한없이 약한 사회적 제재의 힘일 수도 있다. 개인에게 작용하는 그런 사회적 힘들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개인 당사자의 도덕적 책임을 논하는 것이 공정한 설명 방식이다. 그래야 소모적인 ‘을끼리의 싸움’을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사회적 ‘비정상’이나 ‘일탈’로 치부되어 온 소수자의 삶에 대해 페미니즘에서 설명해 온 방식이다. 동일한 설명 방식이 혐오주의 집단화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다만 그들의 주장이 ‘민주주의 확장’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집단적 배제와 혐오의 정상화’를 추구하는 반사회성을 내장한 만큼,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절대적으로 커진다. 또한 결국 자기들만의 리바이어던을 옹립하여 그에게 모두의 주권을 양보해야 한다는 그들의 권위주의는, 봉건적 신분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근대 자유주의 시민의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홍찬숙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본인 제공
홍찬숙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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