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리아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 중후반 서구의 근대적 젠더 규범과 제도들이 확립되었다. 이 시기의 후반부는 대략 프랑스 제3공화정 시기와 겹치는데, 페미니즘에서는 이때를 ‘제1의 물결’ 시기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 참정권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프랑스에서는 특히 제2 제정의 언론 검열이 끝나며 페미니즘 공론장과 조직화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대 프랑스의 젠더 공론장은 현재 한국의 그것과 비교될 만큼 뜨거웠다.
영국과 비교해 산업화가 늦었던 프랑스에서는 당시 여성 노동시장이 확대일로에 있었다. 그들이 과거의 농촌 생산력이 아니라 이제 도시 시장 속에 포섭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와 달리, 당시 프랑스 여성 노동자들은 대체로 집안에서 단순한 기구들에 의존해 봉제 일을 했다. 막 시작된 중공업 산업혁명 속에서도 여성이 고용되었고, 기혼, 미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은 스스로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임금은 그나마 충분치 않던 남성 임금보다도 훨씬 낮았고, 때때로 젊은 여성들은 남의 집 하녀가 되어 유일하게 호의적이었던 주인 남자의 사생아를 낳거나 아니면 공장 노동과 당시의 공창제 속 매매춘을 겸업해야 했다. 그리하여 제3공화정 내내 ‘여성 노동’ 의제는 매우 핵심적인 젠더 의제였다.
정치적으로도 ‘여성문제’는 뜨겁게 등장했다. 이미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여성들, 특히 파리의 하층 어머니들은 혁명 대열에 앞장섰다. 대혁명 전후 계속된 기근과 남성들의 정치 문제 몰두 등으로, 여성들이 실질적 가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체제 전복과 공화정 그리고 파리코뮨 자치정부 구성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혁명적 열성은 역설적으로 여성 정치세력화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라는 사회심리로 귀결되었다. 그들은 혁명의 배신자에게 잔인한 앙갚음을 서슴지 않고, 불을 지르려고 석유통을 들고 돌아다니는 과격한 방화범이라고 악마화되었다. ‘여성의 뇌는 작아서 이성이 없다’는 근대적 편견은 이런 식으로 강고해졌을 것이다.
한편 보불 전쟁 와중에 제2 제정이 몰락하여 공화정으로 회귀한 당시 프랑스에서는 출산율이 계속 감소하고 있었다. 특히 적국인 독일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가운데, 출산율 감소는 국가적 의제가 되었다. 여성의 고립과 가난으로 인해 더욱 촉진된 피임과 낙태, 사생아 유기와 살해 등이 인구 감소를 부르는 여성의 도덕적 타락으로 거론되었다. 물론 출산휴가 등 모성보호와 국가적 아동 보호 등의 여성·아동 정책들이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제3공화정의 사회정치적 불안정과 뒤늦은 시장경제화로 인한 아노미를 여성의 ‘본능적 존재성’과 ‘이기주의’ 탓으로 몰아가는 사회심리는 지속되었고, 결국 여성을 집안 존재로 규정하는 빅토리아 성 규범이 근대 사회 제도화의 근간이 된다.
대혁명 시기부터 정치 시민의 열정적 수행성을 보였던 프랑스 여성들은 역설적으로, 구미 선진국 가운데 가장 늦은 2차대전 이후에야 참정권을 인정받았다. 12.3 계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 리부트 과정에서 프랑스 제3공화정의 이 뼈아픈 ‘반페미니즘 제도화’의 역사는 가슴 깊이 기억되어야 한다. 매서운 한파를 녹인 응원봉 시위와 키세스 시위로 반민주주의 격파에 앞장섰던 청년 여성들의 시민적 기여는 결코 망각되거나 축소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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