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혁신당 조국 비상대책위원장이 9월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혁신당 조국 비상대책위원장이 9월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조국혁신당의 성비위 사건이 파문을 일으켰다. 조국혁신당에서는 절차에 어긋나지 않게 적절히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내력이 쌓인 사건인 데다가 단일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고 2차 가해의 문제가 여러모로 제기되는데, 절차에만 맞으면 정당한 해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절차와 법을 민주주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전부’로 내세우는 그런 태도는 복잡한 기시감을 부르며 오히려 불신을 일으킨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서 ‘절차’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는데, 그 시작은 미국 정치철학자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독일 사회철학자 하버마스의 비판이었다. 롤스는 사회정의를 ‘공정성의 원칙을 구현한 절차를 제도화하여 작동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일단 공정성의 원리를 확립하고 그에 따른 사회의 기본 제도를 확립하면, 그 절차에 의해 사회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목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담론윤리 및 그에 기초한 시민 공론장 참여를 강조했다. 민주주의나 사회정의는 단순히 정의로운 절차에 순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소리가 평등하게 발화되는 공론장의 정의로운 참여를 통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런 ‘목소리 민주주의’에 가장 크게 반응한 쪽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이었다. 마침, 조국 전 서울대 교수가 그중 가장 중요한『차이의 정치와 정의』라는 책을 공동 번역했다. 여기서 저자인 페미니스트 철학자 영은 공론장에의 정의로운 참여가 하버마스가 기대하는 ‘시민적 합의’로 귀결되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합리성’ 개념으로는 여성의 경험에 뿌리를 둔 목소리를 충분히 포괄할 수 없으므로,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합리적 합의’가 아니라 오히려 경험과 목소리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하버마스가 상대화한 ‘절차’의 의미는 더욱 상대화된다. 단순히 절차를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담론 권력에서 주변화된 목소리 약자들까지 포괄하는 사회정의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이 하버마스의 지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정의는 단순한 재화 분배의 올바름뿐만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적 의미구조(담론)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는 주체 차원의 올바름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영은, 사회가 주변화된 목소리를 ‘합리성의 언어’라는 주류적 언어로 번역할 때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합리성’은 흔히 남성들이 당연시하는 경제적 합리성, 권력 쟁취의 합리성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로운 절차를 확립하여 지키는 일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에 불과할 뿐 종착점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면, 사회정의를 법과 절차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입법기관을 무시하고 행정명령을 남발한 정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하였고, 그 정부는 계엄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미국의 트럼프도 현재 거의 동일한 행보를 가고 있다. 법무부가 영어로 ‘Ministry of Justice’인 것은 ‘법=정의’라는 동일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법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지만 동시에 가장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과거 민주당의 (소위 ‘수박’으로 불린) 무능한 세력들이 청년 당원들에 의해 배척된 일도 똑같이 기억해야 한다. 안이하게 법과 절차만을 들먹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도덕적 부당성을 자인하는 행위이다. 법과 절차는 규범이라는 빙산의 드러난 일각에 불과하다. 그것을 아래에서 떠받치는 본체는 앙상한 법조문 뭉치가 아니라 사회적 도덕에 대한 응답성이다.

홍찬숙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본인 제공
홍찬숙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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