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2025년 10월 20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일본 역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됐다. 오랜 시간 남성 정치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리를 여성이 차지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며, SNS를 통해 내년에는 일본의 성 격차 지수(GGI)가 상승하리란 기대의 목소리도 나왔다.
분명 다카이치 총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다. 와세다와 게이오 대학에 모두 합격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현지 전문 대학을 추천받았고, 기자 회견 중 갱년기 증상으로 땀을 흘리자 언론과 대중에게 야유와 비난받은 바 있다. 이 경험으로 여성 건강 사업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했던 사례는 남성 정치인이라면 생각하거나 이뤄내지 못 했을 여성의 고유한 경험에 기반한 정책적 통찰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과연 여성 지도자의 등장이 곧 페미니즘의 진전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실질적 변화와 상징적 변화의 경계를 더 치밀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카이치 총리의 당선은 유리천장을 깬 상징적 승리이지만, 그의 이념과 정책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깊은 역설을 안고 있다.
여성 총리의 등장만으로는 페미니즘 성과 아냐
다카이치 총리에 대한 페미니즘적 평가는 그의 극우적, 보수적 이념 성향과 실질적 정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카이치 총리는페미니즘적 가치와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먼저, 다카이치 총리의 젠더 좌표는 뚜렷하다. 그는 결혼 후 부부가 다른 성(姓)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부 별성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 황실 승계에서는 남계 유지를 원칙으로 삼고, 동성혼 법제화를 거부했다. 여성 인재 등용 의사는 밝히고 있으나, 여성 할당제 등 성평등 정책에는 비판적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여성의 삶을 옥죄는 보수적 사회 시스템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도 지난 10일 5일 엑스(X·옛 트위터)에 “첫 여성 총리가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다”며 “내년 일본의 세계경제포럼(WEF) 성별격차지수 순위가 오를 수는 있어도 정치가 여성에 친화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페미니즘의 목표가 여성을 지도자에 두는 것이 아닐 뿐더러, 서열화 역시 남성 사회의 규범이라는 부분에서 비판한 것이다. 또한 여성주의 정치학자인 오카노 야요(岡野八代) 도시샤대 교수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의 변화가) 구조적 성별 격차 해소에 기여하기보다 여성들을 피해자나 수동적 존재로만 보는 시선을 강화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또 다른 특징은 강경한 민족주의 노선이다. ‘강한 일본’을 내세우고 있는 다카이치에 다수의 국민은 호응하고 있는 상황이다. 1~2일 일본 민영방송 뉴스네트워크(JNN) 조사에 따르면 다카이치의 지지율은 82%를 기록했다. 2027년까지 방위비를 GDP 대비 2%로 늘리기로 한 것을 2년 앞당기겠다고 한 내용에 대해서도 과반(56%)이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가 말하는 ‘강한 일본’에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소녀상 철거 주장, 일본군 ‘위안부’를 두고 “강제 매춘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고 한 발언 등에서 드러나듯, 다카이치의 극우적 태도는 평등과 인권을 핵심 가치로 삼는 페미니즘의 지향과 뚜렷이 맞서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리더십은 여성의 권력 진출이라는 상징을 넘어,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탈민족주의·반폭력 가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다카이치 총리 당선의 양면성
다카이치 총리의 당선은 분명히 일본 정치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서 그 상징적 의미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성공은 일본 사회에 여성도 최고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강력한 시각적 메시지를 던진다. 미래 여성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롤모델이 되고, 여성의 정치권 진입 장벽이 낮아지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카이치의 성공은 예외적 여성의 성공일 뿐, 전체 여성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 마가렛 대처 총리나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았듯, 여성 지도자가 반드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성공이 오직 개인 능력의 결과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다른 여성들이 겪는 구조적 성차별 문제 자체를 외면하는 보수적 경향을 보일 수도 있다.
또 다카이치의 젠더 인식으로 미루어보아, 대다수 일본 여성이 직면한 경력 단절, 비정규직 문제, 낮은 임금, 보육 부담 등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 총리 배출이라는 양적 지표가 수많은 여성의 삶의 질적 평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이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유리천장은 깨졌을지 몰라도, 사회 전반에 깔린 끈적한 바닥(Sticky Floor) 문제, 즉 여성들이 저임금 비숙련 직종에 머무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여성 지도자의 등장을 곧 페미니즘의 진전으로 간주하며 안도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적 관심은 누가 혹은 어느 성별이 최고 권력자가 되느냐를 넘어서 어떤 정책이 실현되느냐로 이동해야 한다. 우리는 지도자의 성별이 아닌 그들의 정책이 실질적인 젠더 평등 지수 상승과 여성 인권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엄격하게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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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들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