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지금 ‘역차별’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외국인 혐오와 전통적 가족주의가 결합된 보수 정치가 다시 부상하고, 인도 역시 종교와 민족주의 결합한 보수 정치가 이어진지 오래됐다. 세 나라의 다른 풍경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가부장적 남성성’이 민주주의의 위기와 맞닿아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후퇴할수록 가부장적 남성성은 다시 힘을 얻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성은 오랫동안 힘과 성과, 지배의 언어로 학습돼 왔다. 타인과 연대하기보다는 경쟁으로,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관계를 이뤄왔다. 이런 ‘가부장적 남성성’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상호존중과 공감의 토대를 흔든다. 정치가 적대의 언어로 채워지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가 일상의 언어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11월 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민주주의 총회 2025(ADA)’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남성과 민주주의(Reimagining Masculinities)’ 세션이 진행됐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과 하인리히 뵐 재단이 공동 주최한 이 세션에서는 한국, 일본, 인도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민주주의가 후퇴할수록 가부장적 남성성은 어떻게 고개를 드는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남성성이 가능한지를 논의했다.

한국의 분열, 일본의 배제, 인도의 참여
한국에서는 반페미니즘 정서가 청년 남성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세력화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확산된 ‘역차별’ 담론은 인권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었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될수록 반작용으로 남성의 권리는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는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청년 남성들이 계엄을 옹호한 후보를 지지했다”며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느끼는 남성들이 오히려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성 자살률의 높음 역시 “가부장제와 성별고정관념으로 인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성성”과 연결된 문제라고 짚었다.
일본 역시 또 다른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사리 카미야마 와세다대 석사과정생은 일본 민주주의가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국가의 틀 안에서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여성의 정치 참여율은 OECD 최하위권에 머물고, 지난 참의원 선거에서 외국인 배제와 혐오 담론이 주요 의제가 됐다. 특히 참정당이 “일본인 퍼스트”, “여성은 가능한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기존 2석에서 15석으로 급증한 것은, 경제 불안이 심화될수록 사회가 보수화되고 그 과정에서 가부장적 남성성이 다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카미야마 씨는 그 결과 재일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노골화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최근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중국을 향한 혐오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한국의 모습과 닮아있다. 일례로 극우 유튜버 전한길 씨는 자신의 온라인 채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향해 “밤에 성폭행 당하고, 중국인들한테 팔려가고 한번 당해보라. 중국 범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하는 소리냐"고 말했다. 이처럼 남성성이 타자를 향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두 나라 모두 비슷하다. 카미야마 씨는 “정치는 힘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돌봄을 조직하는 감수성”이라며 동아시아 국가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새로운 남성성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도의 조이 차터지 아시안공과대 교수는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의 캠페인 ‘벨 바자오(Bell Bajao, 벨을 누르자)’를 소개했다. 이 캠페인은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소리를 들은 남성이 해당 집의 문을 두드려 폭력을 멈추게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단순한 행동은 폭력의 가해·피해 구도를 넘어 시민의 개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이 교수는 “변화는 죄책감이 아니라 참여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며 이 캠페인이 인도 전역에서 1억 명 이상에게 도달했다고 전했다.
남성을 비난의 대상으로만 보는 대신 변화의 주체로 세우는 이 전략은 한국에서 ‘주변인 개입 전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개입자가 늦은 밤 여성을 뒤따르는 남성에게 길을 묻거나, 불필요한 접촉을 시도하는 남성에게 “혹시 바닥에 떨어진 이 지갑이 당신 건가요?” 하고 말을 거는 식이다.
‘관계적 남성성’으로의 전환
세 나라의 맥락은 달랐지만, 세 발표자가 강조한 핵심은 같았다. 한국은 교육에서, 일본은 제도에서, 인도는 문화에서 남성성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관계의 회복’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다름을 견디는 능력, 즉 ‘관계적 시민성’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그리고 이 시민성 안에서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이 싹튼다.
‘이대남’ 담론, 외국인 혐오, 반페미니즘의 언어는 결국 타인의 삶을 상상할 능력을 잃은 사회의 결과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남성에게 감정을 통제하고 취약함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이한 활동가의 말처럼 지금 남성들에게 필요한 건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강함이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고 함께 해석하려는 조력자의 태도다. 그 작은 관계의 변화가 쌓일 때 민주주의는 조금씩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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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들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