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행동강령 선언 30주년]
1995년 이후 성평등 정책 ‘적신호’
한국, 성별임금격차 29년째 1위
“비동의강간죄·차별금지법 도입해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세원 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이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세원 기자

1995년 베이징행동강령이 채택된 이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한국의 여성·성평등 정책이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이래 29년째 성별임금격차 1위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으며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최근 3년 새 50%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여성인권 현실을 진단하며 정부와 국회에 적극적인 정책 복원을 촉구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다. 베이징행동강령은 1995년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189개국 만장일치로 채택된 국제 여성인권규범으로, 여성교육과 여성폭력, 여성인권, 빈곤, 건강 등 12개 분야에서 실천해야 할 목표와 행동 계획을 담고 있다. 베이징행동강령이 발표된 이후 1998년 국내에서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신설됐으며, 이는 2001년 여성부 출범으로도 이어졌다.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회의 ⓒ한국여성단체연합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회의 ⓒ한국여성단체연합

원민경 여가부 장관은 “베이징 선언과 행동강령은 전 세계 여성 정책의 이정표가 되어왔다. 성주류화 전략은 한국에서도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온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왔다”면서도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높은 수준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을 제약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적 영역에서의 차별과 격차도 여전하다. 디지털 성범죄와 스토킹, 교제폭력은 국민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성별임금격차를 해소하고, 여성의 재취업 지원과 직업훈련 기회를 확대해 나가겠다. 젠더폭력도 신속히 대응하고, 더욱 섬세한 피해자지원체계를 갖추겠다”고 강조했다. 

원민경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열린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원민경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열린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기조발제를 맡은 조영숙 한국여성단체연합 국제연대센터 센터장은 전 세계적으로 반 페미니즘 세력이 성평등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 센터장은 “1995년까지 성평등 진전에 비교적 호의적인 환경이 마련됐다. 하지만 이후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역풍이 더욱 거세졌다”고 분석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와 여가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윤석열 정권 하에서 여성·성평등 정책이 크게 역행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5 성별격차지수 보고서’에서 한국은 지난해보다 7계단 하락한 101위를 기록했다. 또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여성은 남성보다 월평균 약 29.0% 적은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임금 격차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큰 것으로 집계됐다.  

조영숙 한국여성단체연합 국제연대센터 센터장이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열린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유튜브 영상 갈무리
조영숙 한국여성단체연합 국제연대센터 센터장이 23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열린 ‘베이징행동강령 3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유튜브 영상 갈무리

조 센터장은 “한국이 경제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여성의 지위와 성평등 현실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토킹과 교제폭력, 디지털 성범죄, 성매매 등 여성폭력 대한 대응도 미흡할 뿐만 아니라 차별금지법과 비동의 강간죄 역시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정현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교제폭력 신고건수는 2021년 5만7305건에서 2022년 7만790건, 2023년 7만7150건, 지난해 8만8394건으로 매년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3년 사이 약 54% 급증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정부가 법·제도 정비 및 스토킹과 디지털 성범죄 등 ‘신종 성범죄’에 적극 대응하고 피해자를 지원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과 괴리가 크다”며 “제3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에 강간죄 개정을 넣었다 철회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선출직 공무원과 정치인의 성폭력 사건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참여자들은 후퇴한 여성인권과 성평등 정책을 복원하기 위해 비동의 강간죄와 차별금지법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국회에서 반드시 강간죄 개정이 통과돼야 한다”며 “현재 정혜경 진보당 의원,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각각 발의했으나 10명 찬성이라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목소리를 내고 제 역할을 해달라”고 촉구했다. 

손솔 의원도 “윤석열 정부 하에서 훼손된 여성운동을 복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차별금지법과 강간죄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국회에 차별금지법 공론화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참여자들은 성평등 추진체계 회복을 위해 이재명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최근 이 대통령이 ‘남성 역차별’을 언급하면서 성차별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임선희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성평등을 정부의 정책 기조로 확립해야 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성평등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최근 여성의 정치 대표성과 관련해 역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개선 조치는 차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유엔과 여러 국제규범의 입장이다. 역차별 프레임이 덧씌워지는 상황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영숙 센터장은 “우파 보수정권은 성평등 정책을 축소하거나 탄압하는 반면 민주정권은 소극적이고, 최소주의로 성평등 정책을 추진한다”며 “이재명 정부 역시 최소주의에 머물 것인지, 적극적인 성평등 정책을 펼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성평등 공시제 도입과 페미니즘 사상검증 근절, 돌봄의 성별 불평등 해소, 이주여성과 장애여성 권리 보호, 지역구 여성후보 30% 공천 의무화, 여성의 대표성 강화 등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2020년 17.3%에서 올해 20.3%로 소폭 상승했으나 이는 OECD 회원국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또한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국내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중은 지난해 8.8%를 기록했다. 

전진숙 의원은 “광역·기초의회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아져야 한다. 공공부문에서도 여성임원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라며 “성별분리통계가 존재하지만, 기관별로 여성의 고위직 비율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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