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회 산하 별도 독립기구에서 처리해야 하는 이유

반복되는 정치권 성폭력, 당차원에서 관리가 될까?
최근 조국혁신당에서 불거진 성비위 사건은 단순히 한 정당의 추문에 그치지 않는다. 정당과 정치권력 내부에서 반복되는 성폭력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위협이다. 사건이 접수된 지 다섯 달이 지났지만 피해자 보호와 지원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가해자 징계는 느리고 미흡했으며, 피해자들은 다양한 2차 가해에 노출되었다. 심지어 조력자들마저 징계를 받았다. 이번에도 피해자 보호는 뒷전으로 밀렸고, 당 지도부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망각한 듯하다.
이 문제는 특정 정당만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 2018년 미투(#MeToo) 운동 이후 정치권은 수차례 같은 시험대에 올랐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박원순 전 서울시장,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건, 민병두 전 의원 사건 모두 더불어민주당에서 벌어졌다. 국민의힘 역시 지방의원들의 성비위 사건으로 수차례 제명 조치를 했다. 그러나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당 지도부의 대응은 늘 비슷했다. 사건이 드러나면 시간을 끌고, 축소하거나 개인의 일탈로 돌렸다. 언론 보도도 잠시 떠들다 곧 사라졌다. 결국 남은 것은 “정치권 전체가 성폭력 문제에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불신뿐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추문’에서 제도 개혁으로
비슷한 상황은 영국에서도 있었다. 2017년, 미국의 와인스타인 사건과 함께 영국 의회에서도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성추문’이 폭로되었다. 당시 유출된 ‘더티 도시에(Dirty Dossier)’에는 보수당 의원 40여 명의 성비위 의혹이 적시되었고, 언론은 이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가디언》은 “웨스트민스터는 성희롱 문화의 온상”이라고 규정했고, 《인디펜던트》는 의원들의 일탈을 “민주주의 신뢰를 잠식하는 좀”에 비유했다. 여론이 들끓자 보수당 국방장관 마이클 팰런은 기자 성희롱 사실을 인정하고 사임했고, 내각부 장관 데이미언 그린과 노동당의 켈빈 홉킨스도 성추문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총리였던 테레사 메이는 그해 11월 영국 경영자 총연합회(CBI) 연차총회 연설에서 “정치권 내 권력의 남용과 오용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의회 직원들이 고용주의 당적에 따라 다른 절차를 전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원의장에게 “의회 차원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독립적이고 구속력 있게 다루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이 사건은 결국 초당적 협의를 거쳐 2018년 ICGS(Independent Complaints and Grievance Scheme, 독립적 불만·불법행위 처리 기구) 도입으로 이어졌다. ICGS는 모든 의회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행동규범을 제정하고, 피해자가 정당 지도부가 아닌 독립적 헬프 라인에 직접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외부 조사관이 사건을 맡아 의회 표준 담당관과 독립 전문가 패널이 징계 여부를 결정하고, 결과는 공개된다. 피해자는 상담·심리 지원·법률 자문 등 제도적 보호를 보장받았다. 물론 ICGS에도 조사 지연 등 한계가 있었지만, 최소한 영국 의회는 성폭력 사건을 “정치적 리스크 관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신뢰 회복의 과제로 전환했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이 과정을 밀착 감시하며 제도의 안착을 압박했다.
한국 국회에도 독립 기구가 필요하다
지난 9월 4일 강민정 전 대변인의 탈당 기자회견 전문에는 피해자들의 “외부 조사기구 설치 요구”가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만약 영국의 ICGS 같은 체계가 있었다면, 피해자들은 가해자 측근이 장악한 윤리위 앞에서 고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적 조사, 법률·심리 지원, 결과 공개라는 기본적 서비스가 있었다면, “배은망덕한 것들”이라는 2차 가해 대신 최소한의 존엄과 회복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이미 인권위도 있고, 여가부도 있는데 왜 국회에 별도 기구가 필요한가?” 인권위는 권고 권한에 머물러 강제력이 약하고, 여가부는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을 직접 제재할 권한이 없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은 정치적 보복을 우려해 외부 기관에 호소하기 어렵다. 영국이 기존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전용의 독립 절차를 새로 만든 것도 같은 이유였다. 국회라는 특수한 권력 공간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강제력 있는 독립 기구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 때 한 표를 던지는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같은 목표를 가진 ‘동지’로서 모든 당원의 인격이 존중받고, 피해자가 사과와 시정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 현실에서 이런 요구는 종종 “당을 흔드는 행위”로 매도된다. 민주주의를 절차와 권력 다툼으로만 이해하는 정치권의 구태의연한 태도는, 국민주권이 일상에서 살아 숨 쉬는 민주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표를 던지는 순간보다, 서로를 존중하고 절차를 지켜내는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깊어진다.
정치 지도자들의 뒷북 사과도, 속이 훤히 보이는 음모론적 논평도 이제 지겹다. 피해자와 시민이 원하는 것은 보여주기식 사과나 공허한 도덕 담론이 아니라, 실질적 변화를 보장하는 제도다. 정당 내 성폭력 사건은 은폐와 리스크 관리로 덮을 수 없다. 국회는 즉각 독립적 조사·징계 제도를 마련해야 하고, 시민사회는 이를 끝까지 감시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신뢰 회복은 국회와 정당이 먼저 인권 존중의 제도적 모범을 보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선택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인물 소개 :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영국 보수당 소속 정치인, 2016~2019년 총리 재임. 흔히 ‘브렉시트 총리’로 불리지만, 2017년 웨스트민스터 성추문 당시 “정치권 내 권력의 사용과 오용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주목을 받음. 이 발언은 의회의 독립적 성비위 처리 절차(ICGS) 도입으로 이어졌으며, 성폭력 사건을 ‘정치적 리스크’가 아닌 민주주의 신뢰 회복의 과제로 전환시킨 분기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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