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육상선수 로런 플레시먼. ⓒ연합뉴스
미국 육상선수 로런 플레시먼. ⓒ연합뉴스

지난 주말 여성만 참여할 수 있는 주짓수 모임에 갔다. 앳된 얼굴에 회색 벨트를 맨 여성이 다가와서 스파링을 청했고 기껍게 수락했다. 속으로 그렇게 실력자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상대는 나보다 힘이 셌고 기술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듣기로 회색은 청소년들이 매는 벨트라고 해서 고등학생이냐고 물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던 그는 중학생이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중등부의 스타 선수였다.

그를 보자 주짓수 도장에서 함께 수련하는 여성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입시 때문에 운동을 등한시하기 쉬운 시기에 꾸준하게 운동하러 오는 모습이 그저 예쁘게만 보였다. ‘어릴 때 운동 하나쯤 배워둘걸’ 하고 후회한 나로서는 그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좀처럼 지치지 않고 또 금방 회복되는 체력이 부럽고 유연성이 부럽고 겁 없이 싸우는 대담함이 부럽고 또 그 모든 게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것도 부럽다.

여성 선수에게 사춘기가 곧 부상인 이유

학창 시절 귀가 시간이 거의 11시였던 탓에 운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쯤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도 그 시간에 운동을 배우진 않았을 거 같다. 체육 시간을 가장 싫어했고 운동이라면 끔찍했으니까. 그런데도 기억을 더듬으면 몸을 움직이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없지 않다. 실기 점수를 받기 위해서 맹연습했던 농구 자유투와 배구 토스를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때도 힘이 세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하지만 잠깐의 즐거움이 운동을 진지하게 배우면서 신체를 단련하는 과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청소년 시절 나는 내 몸이 운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운동하기엔 무겁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잘하지도 못할 일에 굳이 도전할 필요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와 운동을 권하는 사람이 없는 환경으로 인해 일찌감치 운동하는 몸으로서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여자치고 잘 뛰네’를 쓴 로런 플레시먼은 여성의 사춘기와 운동의 상관관계를 풍부한 경험과 데이터로 분석했다. 그는 미국대학체육협회 선수권대회에서 챔피언을 다섯 번이나 석권하고 세계육상연맹이 주최하는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두 번 우승한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다. 그에 따르면 여성 선수들은 대략 12세까지 또래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하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크나큰 변화를 맞는다. 2020년에 발표된 연구 결과를 보면 10대 후반의 캐나다 남자 청소년은 10명 중 1명이 운동을 그만두지만 여자 청소년의 경우 3명 중 1명이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 말대로 여성 선수에게 사춘기는 치명적인 부상과 다름없다.

왜 하필이면 사춘기일까? 남성은 18~22세에 테스토스테론이 최고조에 달하고 훈련 능력이 극대화된다. 반면 같은 시기에 여성의 몸은 생식력이 극대화된다. 문제는 지금의 스포츠 교육과 산업 시스템이 모두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남성의 신체가 기본값인 스포츠계에서 여성 선수는 자신의 몸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사춘기를 맞은 여성 선수들이 체중감량으로 무월경 상태를 유지하는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훈련하다가 몸에 무리가 와서 일찍 은퇴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스포츠 시스템 자체가 여성의 필수적인 생리적 경험을 평가절하하거나 부정하고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우선순위를 강조함으로써 여성에게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제야 내 몸은 운동하는 몸이 아니라고 속단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성에게 여성의 몸이 중심인 시스템을 찾아주자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내가 운동하는 몸으로서의 가능성을 닫아버린 일에 대해 얼마쯤 자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더 적극적이었다면, 더 도전적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있었다. 이제는 이 문제가 복합적이고 구조적이며 여전히 사회 문제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문제의 피해자로서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도.

로런 플레시먼이 2016년에 은퇴한 후 여성 청소년을 지도하는 코치로 활동한 것도 그래서다. 그는 여성 선수가 월경 주기를 되찾고 신체를 긍정하면서 훈련할 수 있도록 대안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우리도 여성 청소년들에게 여성의 몸을 중심에 둔 운동법과 시스템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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