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이렇게 오래 광장이 열린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12월 3일의 그 날로부터 무려 4개월 가까이 광장의 열기는 추위에도 식을 줄 모르고 이어져 어느새 봄을 맞았다. 지금은 비록 모두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는 ‘헌재의 시간’이라지만, 그렇다고 광장이 닫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오래, 언제보다 다양한 목소리로 저마다의 깃발이 모여 광장을 이룬 것을 모두가 목격했다.
대통령 탄핵 그리고 비동의강간죄
광장은 살아있는 화산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뿜어냈다. 오래된 86년 체제의 종식을 위한 개헌 제안부터 수도권 과밀과 지역 소멸 문제, 불평등 심화까지 다양한 사회 문제들의 해결이 윤석열 정권의 종식과 함께 대두되어 왔다.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그 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목소리였다.
대통령 탄핵과 비동의강간죄 도입이 무슨 연관성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2023년 1월, 윤석열 정부 산하 여성가족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양성평등기본법에 명시된 5년 단위의 말 그대로 ‘기본계획’이다. 특별한 발표가 아니라 법률에 근거를 둔 여성가족부의 ‘업무’였다. 해당 기본계획 중에는 “형법 제297조 강간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 검토”한다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박근혜·문재인 정부 때부터 여성계와 시민들이 오랜 시간 정치권에 요구해 온 입법 과제였다. 심지어 2018년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영국과 독일, 일본까지 도입한 비동의강간죄는 세계적인 흐름이자 거부할 수 없는 변화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시대를 거슬러 가기로 결심했다. 여성가족부의 기본계획 발표로부터 6시간 뒤, 법무부는 갑작스레 “비동의강간죄 개정 계획이 없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여성가족부의 기본계획은 법무부와 사전 협의한 내용이며, 1년여의 시간 동안 함께 준비한 계획이었다.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당시 기본계획을 총괄했던 김종미 전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국장이 해당 건과 관련해 대통령실로부터 감찰 조사를 받았던 것이 추후 밝혀졌다. 오랜 시간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왔던 입법 과제와 법률에 근거해 준비한 정책이, 마치 절차를 무시한 계엄의 그날 밤처럼 몇 시간 만에 대통령의 이름으로 뭉개진 것이다. 탄핵 광장에 다시 등장한 비동의강간죄 도입 요구는 준엄한 국민의 명령을 함부로 뭉갠 권력에게 내리치는 호통과 다름 없었다.

비동의강간죄, 무엇이 두려운가.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발언하고, ‘여성가족부 폐지’ 등의 비합리적인 여성혐오를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용했던 윤석열 정부는 사실상 젠더폭력을 방치했던 정권이었다. 지난 4일 대검찰청 발표에 따르면 미성년자 대상 성폭력 사건 접수 건수는 지난해 8,052건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N번방과 텔레그램 성착취 사태 등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던 디지털 성범죄의 증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과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 역시 정부의 방치하에 반복되었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은 곧 젠더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심판일 수밖에 없고, 그간 미뤄진 성평등 정책의 도입과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필수적이다. 강간죄의 구성 요건이 여전히 ‘폭행·협박’에 머문다면, 법적으로 폭행·협박을 인정받기 어려운 강간 피해자들은 그 존재를 부정당하게 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강간 피해자들은 ‘폭행·협박’이 있었음을, 자신이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를 수사기관과 재판부에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하고, 심지어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 공판에 출석하지 못해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No means no.” 나아가, “Yes means yes.”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막는 이들,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동의 없는 성관계를 처벌’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야만의 시대로 퇴행하는 것을 원하는가.

지난 7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간한 ‘2024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전체 강간 피해 상담 218건 중 폭행·협박이 없음이 70.2%, 강제·강압이 17%로 폭행·협박이 명확한 강간은 전체 중 12.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법적으로 폭행·협박을 인정받기 어려운 피해 상담이 무려 87.2%에 달하는 것이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강간죄를 바꾸자는 것이다. 여기에 대체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가.
일부 남성들은 비동의강간죄 도입 반대의 이유로 ‘무고죄’를 언급하기도 한다. 2017~18년 실시된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로 기소된 피의자 수와 비교했을 때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피의자 수는 0.7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성폭력 무고죄로 고소된 사건 중 유죄가 인정된 비율 역시 6.4%에 그친다.
심지어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한 여러 국가들의 선례 중 부당한 무고를 막기 위한 보완책까지 포함한 제도 역시 존재하나, 무고죄를 말하는 사람 치고 이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정말로 부당한 무고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고죄를 빌미로 비동의강간죄의 도입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기로 결정한 22대 국회는 광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즉각 시행해야 한다. 불법 계엄 없는 대한민국을 바라는 만큼, 동시에 비동의강간죄 있는 대한민국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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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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