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최근 화제인 <중증외상센터>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가히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주인공 의사 백강혁이 종횡무진하며 목숨이 위험한 환자들을 살려내는 게 주된 줄거리다. 과장되면서도 통쾌한 주인공의 활약이 지지부진한 현실을 잊게 하는 매력이 있다. 참 재밌게 열심히 보고 있기는 한데 가끔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다. 특히 주인공 백강혁 캐릭터를 볼 때 그렇다. 잘생기고 천재면서 직업 소명감도 뛰어난데다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너무 완벽한데, 역시나 너무 ‘싸가지가 없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싸가지 없는 캐릭터는 만화, 영화, 드라마 등 각종 창작물의 흔한 클리셰다. 소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부터 만화 <슬램덩크>의 ‘서태웅’, 영화 <위플래시>의 스승 ‘플레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창작물에서 이런 성격적인 결함은 캐릭터의 매력을 더하는 요소일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백강혁이 버럭 소리를 지를 때마다 ‘어우 대체 왜 저렇게 윽박지르는 거야…’하는 한숨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흔한 남성 캐릭터, 아니 남자들
그러니까 미디어와 현실을 막론하고 남성들은 다정하게 이야기하기보다 윽박지르는 모습이 흔했다. 내가 보고 배운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내가 청소년이던 시절 당시 미디어에 유행하던 남성 캐릭터는 주로 ‘나쁜 남자’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대체로 싸가지가 없고 제 잘난 맛에 살기 바빴으며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수많은 미디어에서 남성이 직업세계 같은 더 진지한 공적인 문제에 집중하느라 감정이나 돌봄 같은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음을 은연중에 보여줘 왔다. 여러모로 어딘가 잘못 되어있는 이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이상한 바람이 들어 고독하고 쓸쓸한 남성 코스프레를 하느라 외롭고 고단한 시기를 보내면서도 ‘성공’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이상한 망상을 놓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게 단지 나만의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디어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의 감정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연애 예능에서도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경제력이나 능력을 매력으로 어필하기 급급하고 많은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고난과 역경에도 아랑곳 않고 혼자 묵묵히 문제를 해치우다가 여성 주인공을 구하고 사랑을 쟁취해냈다. 그래서인지 내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우락부락한 남성들이 등장해 징징거리지 말고 운동해서 몸을 키우고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그렇게 윽박질렀다.
구시대적인 가부장적 남성성, 그래서 행복할 수 있나요?
운동하고 성공해서 좋은 남성 되는 게 모두 쉽다면야 뭐가 문제겠는가. 다만 세상에는 분명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성들의 이러한 세계관에서 사회구조를 지적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으로 여겨질 뿐이고 실패를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며 용납하지 않는다. 이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언제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는 사회적 약자조차 배려, 존중하지 못하고 그저 경쟁자로만 여기는 잔인한 현실을 만들었다.
게다가 운 좋게 노력이 빛을 발한다고 해도 그게 곧 행복과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미디어에서 고난과 역경은 대개 사랑이라는 성취로 이어진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도 성적표, 몸무게, 은행 잔고를 바꾸는 노력과 배우자를 구하는 노력은 엄연히 다르다. 사랑의 대상은 그저 트로피가 아닌 생각과 욕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관계를 가꾸려는 노력 없이 다짜고짜 고백공격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꼴을 무수히 보았다. 운 좋게 관계가 이어지더라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사려 깊은 배려와 존중, 대화 없이는 결국 또 다시 외롭고 쓸쓸한 가부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다양하고 다정한 남성성이 필요하다
능력과 성취에만 집착하며 끊임없는 경쟁으로 타인을 배척하고 윽박지르다 외로워지기보다 조금 부족하고 미숙하더라도 돌보고 도우며 함께 즐겁게 살 수는 없을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남성 캐릭터가, 주변인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나도 많은 게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남성을 발굴하고 보여주고 있다.
유튜버 중에서는 최근 화제가 된 ‘인생 녹음 중’이라는 채널에 나오는 남성도 흥미롭게 보고 있다. 배우자와 함께 노래 부르고 농담을 나누는 게 주요 콘텐츠인데 자세히 들어보면 상대를 놀리거나 조롱하는 방식으로 웃기려 하지 않고 자상하면서도 사려 깊게 소통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외에도 봉태규나 문세윤, 문상훈, 장항준 같은 캐릭터가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이들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미디어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상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상대방과 소통하는 모습이 늘 인상 깊었다. 이들의 존재가 반갑고 기쁜 건 이들의 등장이 구시대적 가부장 남성성 변화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존재는 각종 롤모델을 찾는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빛과 희망이다. 지금도 학교에 가면 꼭 과거의 나 같은 존재가 있다. 덩치를 키우거나 경쟁하는 등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동떨어져 있는 존재들. 아무래도 주눅 들어 있는 때가 많고 유난히 마음이 쓰이기도 해서 자주 이들에게 다가가 나 역시 그런 청소년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대단히 반색하지는 않아도 더 호기심 가지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강사를 바라보고 교육에 참여하는 게 느껴진다. 남성들에 대한 각종 이야기로 세상이 시끄럽고 나부터도 고민이 많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을 온전히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들을 만나 변화를 보여주고 이야기하자. 남성들에게는 더 많은 다양한 남성성의 모습이 필요하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