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좋은 날에는 친구들과 피시방에 모여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벌이기도 하고, 나쁜 날에는 현세로부터 도망쳐 게임 속 세상을 여행하며 위로를 찾기도 했다. 게임은 내게 소중한 친구이자 돌봄이었다.
게임을 포위한 폭력과 혐오
늘 즐거울 수는 없었다. 특히 게임 속 욕설 문화는 지금도 날 머뭇거리게 하는데, 조금만 실수해도 혹은 잘못한 게 없어도 어김없이 날아드는 욕설과 소위 ‘패드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특히 ‘엄마’를 타겟으로 한 욕설이 난무했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읜 내 입장에선 “엄마 없냐?”고 묻는 채팅에 진짜 없다고 해줘야 할지 신고해서 본때를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그 유저가 특이했던 게 아니다. 부모의 안부는 심한 축에도 못 낄 정도니까.

경험적으로 분석했을 때, 게임 내에서 욕을 먹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게임을 못하거나 조작에 능숙하지 않을 때다. ‘게임을 못하면 당연히 욕을 먹어 마땅하다’는 생각에 기초한 이 태도는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남성 문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을 엄청 잘할 때다. 소위 ‘극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현상은 상대방이 게임을 너무 잘하거나 대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할 때 일어나는데, 진짜 ‘칭찬’ 대신 욕설을 사용하는 모습 역시 ‘칭찬이나 따뜻한 말을 하지 못하는 남성성’의 발현으로 읽을 수 있다.
세 번째는 바로 유저가 ‘여성’으로 보일 때다. 게임을 하다 본인이 여성이라는 걸 밝히거나 상대가 인식하는 순간, 많은 남성 유저들의 표적이 되고 만다. “무슨 여자가 총싸움 게임을 하냐”는 식의 여성혐오부터 시작해, 각종 욕설과 성희롱이 난무한다. 심하게는 게임 메신저로 다짜고짜 성기 사진을 보내는 ‘딕픽(dick pic)’의 피해를 겪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게임 유저들의 이런 공격이 게임 밖으로까지 이어졌다. 2016년 넥슨이 일부 이용자들의 비상식적인 ‘사상 검증’을 수용하며 게임 ‘클로저스’의 성우를 교체한 사건부터 시작해, 2023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집게 손가락 사상 검증’까지, 게임을 둘러싼 폭력과 혐오는 날로 심각해지며 실제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다. 이대로면 대한민국 게임 문화는 폭력과 혐오에 포위당해, 처음 만나는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욕설과 성희롱을 퍼붓는 괴물들만 남을지 모를 일이다.
정말 ‘PC’가 문제일까?
그렇다고 게임 자체가 잘못됐고 더 많은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전혀 아니다. 많은 유저들이 게임 자체를 그저 ‘나쁜 것’으로 취급하는 매도에 신물 나고, 청소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게임 셧다운제’의 도입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게임에 대한 편견에 맞설 만큼 대한민국의 게임 문화와 환경이 건강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유저들은 본인 역시 경험해야 했던 폭력과 혐오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부의 간섭을 당당히 거부하려면 자율적인 자정 작용이 존재해야만 한다. 남성 문화와 결착해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재의 게임 문화가 유저들의 노력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게임은 폭력과 혐오가 판치는 불모지로 남거나 각종 정부 규제의 시험장이 될 뿐이다.
나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PC’를 ‘특별 아이템’으로 제안하고 싶다.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은 인종·성별·장애·직업 등에 관한 편견이나 차별이 섞인 언어 또는 정책을 지양하려는 신념과 움직임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인종 다양성을 중시하는 일이나 성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역시 ‘정치적 올바름’에 포함된다. 일부 유저들은 ‘PC’가 게임을 망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게임 전문 리서치 업체 ‘니코 파트너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 전체 게이머 중 여성 비율이 약 37%에 육박하고, 매년 남성 게이머의 2배 가량 늘어날 전망이라고 한다. 하지만 해당 보고서의 응답자 절반 이상이 게임에서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이 불편하고, 게임 내 플레이어 간 성차별 문제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글로벌 게임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인기 게임 ‘오버워치’의 경우 여러 인종과 성정체성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게임의 연출과 스토리에도 이러한 ‘다양성’이 중요하게 반영된다. 다양성은 비단 게임 콘텐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게임사들은 팀 구성과 조직 문화에도 다양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면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를 선도한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게임 문화가 이러한 새로운 표준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폭력과 혐오의 세계관에 갇혀 있다면 금세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는 ‘오버워치’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FPS 게임이지만 여성혐오적 콘텐츠에 매달리다 실패한 ‘서든어택 2’가 주는 값비싼 교훈이기도 하다.
게임은 함께할 때 가장 재밌는 법이니까!
‘PC’가 게임을 더 재미없게 만들까? 아니다. 게임이 망하는 이유는 ‘PC’ 때문이 아니라 진짜 재밌지 않아서 망하는 것뿐이다.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일은 더 다양하고 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자정 작용의 역할을 함으로써 지속가능한 게임 문화를 만들어가게 할 것이며, 이는 게임계에 더 많은 투자와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하여 모두와 함께 즐기는 ‘대게임 시대’를 여는 첫 걸음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는 꿈꾼다. 게임이 당당한 취미가 될 수 있는 세상, 누구나 자유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세상, 게임이라는 문화가 더 이상 평가절하 되거나 조롱 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게임은 함께할 때 가장 재밌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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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