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서도 케이팝 팬덤 반정부·민주화 시위 참여
성소수자·환경·여성혐오 문제에도 꾸준히 목소리

1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1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촉구 집회 현장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케이팝(K-Pop) 아이돌 팬덤의 응원봉이 연일 화제다. 언론도 아이돌 팬덤이 광장을 매운 배경을 분석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일부 정치인은 이 같은 흐름에 편승하듯 응원봉을 들고 있는 사진 혹은 탄핵 시위에 참가한 아이돌 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했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케이팝의 정치화’에 주목하고 있다. 

케이팝 산업 바깥에 위치한 외부인에게 케이팝의 정치화는 사뭇 낯선 풍경일지 모른다. 하지만 케이팝 팬덤은 이미 오래전부터 누구보다 능동적인 정치적 집단이었다. 다만 케이팝이 전 세계를 뒤흔드는 사이에도 팬덤을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집단’으로만 인식하며 이들이 내는 목소리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 않았을 뿐이다.  

‘빠순이’ 저항과 연대의 아이콘

아이돌 팬덤은 오랜 세월 ‘빠순이’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호명돼왔다. 빠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폄하되는 사이 팬덤은 정치적인 주체로 진화를 거듭해왔다. 특히 해외에서 케이팝 팬덤은 이미 각종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저항과 연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민중가요로 자리매김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는 2020년 태국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도 울려 퍼졌다. 광장으로 나온 태국의 젊은 세대는 다만세에 맞춰 춤을 추며 민주화와 군부 정권의 종식을 외쳤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케이팝 팬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에 적극 힘을 보탰는데, 방탄소년단(BTS) 팬덤 아미는 단 하루 만에 100만달러(약 15억원)를 모은 뒤 BLM 캠페인에 기부해 화제를 모았다. 또한 케이팝 팬덤은 2020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선거유세 현장에서 ‘노쇼’ 캠페인을 벌이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각됐다. 당시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은 케이팝 팬덤을 향해 “정의를 위한 싸움에 기여해 줘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엑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의 엑스(X·옛 트위터) 계정 갈무리

케이팝의 초국적이고 혼종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들 팬덤은 항상 사회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팬덤은 특히 인종차별과 문화전유, 문화적 다양성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외에도 케이팝의 젠더리스(Genderless·성별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음) 콘셉트는 수많은 퀴어 팬을 끌어모았으며, 케이팝 퀴어 팬덤은 성소수자 담론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물론 연예인의 정치적 발언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국내 기획사가 케이팝의 탈정치화를 추구한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일부 국내 팬덤 역시 좋아하는 아이돌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목소리를 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보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케이팝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이미지를 원하면서 정작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해외 팬덤과 국내 팬덤 역시 아티스트의 정치 참여 문제를 두고 종종 충돌했다. 올해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집단말살·genocide)가 지속되면서 해외 케이팝 팬들이 아이돌에 이스라엘 기업 보이콧 동참을 촉구하자, 국내 팬들이 정치적 행동을 강요하는 것 역시 폭력이라고 반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노동환경 개선, 여성혐오 컨셉 수정 요구하는 팬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12월 13일 오후 국회 본관 앞에서 소녀시대 팬덤의 응원봉을 들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12월 13일 오후 국회 본관 앞에서 소녀시대 팬덤의 응원봉을 들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 케이팝 팬덤을 평가절하할 수 없다. 국내 케이팝 팬덤 역시 봉사활동과 기부, 사회적 캠페인 등의 집단 활동을 통해 꾸준히 정치적 행위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는 모회사 하이브로부터 차별·부당 대우를 받았다고 뉴진스가 폭로하자 팬덤인 버니즈가 아이돌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함께 움직인 사례가 있었다. 

2016년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과 2018년의 버닝썬 게이트는 아이돌 팬덤에도 큰 분기점이 됐다. 두 사건을 기점으로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된 아이돌 팬덤은 이후 좋아하는 아이돌의 여성혐오적인 가사나 콘셉트의 수정을 요구하고, 성범죄에 연루된 멤버의 탈퇴를 적극적으로 촉구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여성 아이돌이 잇따라 세상을 등지자 팬덤은 미디어와 온라인상에서 재생산되는 여성혐오적인 문화를 향해 날선 비판을 날리며 여성 연예인을 향해 연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엔시티와 마마무의 퀴어 팬덤인 엔시티큐와 무지개무무는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며 성소수자에 연대했으며, 아이돌 팬들이 설립한 환경단체 케이팝포플래닛은 케이팝 친환경 문화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팬덤이 언제부터 정치적이었냐고? 

2022년 하이브 사옥 앞에서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들.  ⓒ케이팝포플래닛
2022년 하이브 사옥 앞에서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들.  ⓒ케이팝포플래닛

이번 집회에서 등장한 ‘선결제 문화’ 역시 아이돌 팬덤의 나눔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아이돌의 콘서트장과 팬미팅장 등은 이미 오래전 ‘나눔의 장’이 됐다. 아이돌 팬들은 콘서트를 비롯한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아이돌 굿즈와 음식 등을 다른 팬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곤 한다. 콘서트장에서 처음 만난 옆자리 관객과 인사를 나누며, 내가 가져온 간식과 굿즈를 나눠주는 일은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이미 흔한 일이다. 

20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열애설로 퇴출 위기에 놓인 멤버를 보호하기 위해 광고주에게 공문을 보내고, 트럭 시위를 이어갔던 지오디 팬덤이 있었으며, 음악저작권 개선을 위해 국회 토론회까지 개최했던 서태지의 팬덤도 존재했다. 아이돌 팬덤은 그간 편견에 가려졌을 뿐 항상 누구보다 정치적인 주체였다. 아이돌 팬덤이 언제부터 정치적이었냐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야말로 팬덤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로 팬덤을 곡해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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