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향린교회서 열린 ‘남태령 집담회’
12월 21·22일 밤샘 ‘남태령 대첩’ 동지들
연대 경험과 꿈꾸는 세상에 대한 의견 나눠
전농, 전장연, 동덕여대…연대는 다시 연대로
“다름 존중하고 차별·배제 않는 세상 바라”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은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12월 21일과 22일, ‘남태령’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밤을 지새운 ‘동지’들은 그곳에서 강력한 연대의 힘을 배웠다고 했다.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진입하려면 6070 농민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은 민중가요 ‘농민가’를 서로 배우며 열창했다. 현장에 가지 못해 밤새 라이브 영상을 지켜보며 커피와 죽, 김밥과 핫팩, 난방버스를 보낸 시민들도 트랙터 곁을 지켰다. 혹한에 28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은 결국 차벽을 뚫었고 경찰은 길을 열었다. 연대가 일궈낸 성취다. 이날 남태령에서 탄핵 너머 트랙터와 응원봉이 만나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트위터 보고 남태령으로 달려갔다
일주일 뒤 그날의 ‘동지’들이 다시 뭉쳤다.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남태령 뒤풀이-남태령 대첩을 함께 한 우리들의 집담회’가 열렸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이 마련한 이 자리에 일명 ‘남태령 대첩’에 참여했던 시민 70여명이 참여했다. 참가자 90% 이상이 여성이었다.
남태령 대첩이란,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 4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해 12월 16일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향한 농민들이 12월 21일과 22일 서울 입구인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 차벽에 고립되자 2030 여성 중심의 시민 3만여명(주최 측 추산)이 합류해 차벽을 뚫은 사건이다. 지난 12월 16일 전라·경남에서부터 시작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전여농)의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은 22일 마침내 동작대교를 건너 한남동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트위터’와 ‘라방’(라이브방송)을 통해 남태령 소식을 접했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냅다” 응원봉을 들고 남태령역을 향했다고 했다. 집담회가 열린 공간 앞에는 참가자들이 적은 남태령 대첩 참여 동기와 이들이 원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참가자들은 혹한에도 남태령에 달려간 이유로 “비상계엄 때 국회로 가지 못한 부채감에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서 머릿수 하나라도 채워야겠다는 마음에”, “미래의 나에게 부끄러울 수 없으니까”,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더는 폭력적으로 진압할 수 없단 말에”. “양심”이라고 적었다.

상당수는 “트위터(현 X)를 보고” 남태령으로 향했다고 했다. 트위터 이용자 ‘향연’(닉네임)의 게시물을 보고 현장 상황을 알게 됐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향연’ 여성 농민 김후주씨도 참여했다. 김씨는 트위터에서 전농 활동 소식과 양곡법 등 농업 정책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연대를 독려해왔다. 그가 당시 공유한 남태령 진압 영상은 순식간에 48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는 “당연하게 경찰의 강제진압을 각오했던 농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남태령으로 달려온 여성들을 보고 굉장히 놀라고 고마워하셨다. 시민들이 곁에 있기에 집회 방식도 달라질 수 있었다”며 “남태령에서의 경험이 또 다른 연대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저도 큰 책임감과 함께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태령 대첩은 단순히 농민들의 투쟁 승리를 넘어 사회 개혁의 물꼬를 틔웠다는 생각에 감격이 벅찼다”고 강조했다.
이춘선 전여농 정책위원장은 “농민 투쟁은 이기는 싸움이 되기 어려운데 그날 희망을 봤다. 연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박선아 전농 대외협력국장도 “지난 2016년 1기 전봉준 투쟁단 때에는 세 차례 출정했지만 ‘우리만의 싸움’으로 끝이 났으나, 남태령에서는 차벽에 가로막혔던 트랙터가 시민들의 외침 끝에 서울 도심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는 한 농민의 소감을 전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형제들’ 대신 ‘우리들’… 서로 배웠다

참가자들은 남태령 대첩 당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남태령에서 밤샘을 하고 첫 차를 타러 가려는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던 수많은 시민들의 행렬”, “‘농민가’ 가사를 ‘형제들’에서 ‘우리들’로 개사해 부르던 순간”, “몸을 녹이러 들어간 농민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던 어르신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다란 양모담요를 덮어줬던 순간”, “자원물품으로 받은 김밥 맛”, “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몸을 녹이고 있던 여성들”을 꼽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도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점을 꼽는 이도 있었다. 직장인 김남희씨는 “여러 집회에 참여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과감 없이 드러내고 따뜻하게 포용되는 자리는 남태령이 처음이었다”며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여겼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지’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프리랜서 요술봉(닉네임) 님은 “제가 젠더를 확정 지을 순 없지만 남태령 집회 참석자 상당수가 여성으로 추측되는 분들이었다. 발언자들은 자기 소개를 하며 정체성을 밝히는 분들이 많았는데 ‘소수자’가 환대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저도 여성이면서 페미니스트이고 퀴어이자 교제 성폭력 생존자이며 신경다양인이라는 여러 정체성을 갖고 있다. 여러 정체성이 겹쳐서 제가 되고 당신이 되는 것 같다”며 “정체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시민들은 ‘남태령’ 같은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차별 없는 세상”, “다름을 존중하는 세상”, “커다란 해일 앞에 조개 줍는 소리로 취급하지 않고 존재하는 목소리로 인정받는 것”, “‘최애’가 살기 좋은 세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세상”, “‘기브 앤 테이크’ 문법이 깨지고 ‘냅다’하는 연대가 가능한 세상”, “연대에 응답하는 사회”, “다정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는 사회”, “페미니스트가 낙인이 되는 않는 사회”, 이런 ‘세계’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농민의 문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태령 현장 구호였던 “우리는 이긴다”는 시민들이 결국 농민 문제가 우리의 먹거리 문제이며 인권 문제로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발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동덕여대 집회, 전태일 의료센터 건립 기금 마련에 시민들의 참여가 불붙고 있다. 다만 더 이상 이들은 ‘기특한 소녀’나 ‘고마운 딸’로 불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시민들은 이제 ‘동지’ 그리고 ‘동료 시민’으로 불리길 원했다.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 (‘남태령 대첩’ 참가자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