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책의 개척자 김영정 전 정무(제2)장관
여성정책의 개척자 김영정 전 정무(제2)장관
  •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12.06.29 12:19
  • 수정 2012-06-29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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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길 찾기’에 동행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 “우리 당이 가족법 개정” 발언에 “여성계 노력의 결실”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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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올해도 어김없이 여성주간이 찾아왔다.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의 질과 사회진출의 명암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이때, 여성 발전사의 의미 있는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김영정(83·사진) 전 정무(제2)장관을 만났다. 김 전 장관은 한국여성개발원(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초대 원장,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초대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1980~90년대 현장에서 여성정책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2년 현재, 그는 “난 이제 은퇴한 사람인데…”라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당시 내가 여성들과 함께한 일이 목표의 10분의 1에 불과할지라도 어쨌든 시도해봤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한국 여성사 영역 작업을 계기로 여성학의 매력에 빠져

“시작은 당시 김옥길 총장님이 (이화여대 부설 한국)여성연구소 개소 준비를 하시면서 고 김활란 총장을 기념하는 한국 여성사의 영역 작업을 내게 맡기신 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죠(이대 영문과 출신인 그는 졸업 후 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인디애나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30대 젊은 나이에 대학원장으로 발탁돼 대학원의 기틀을 닦는 작업에 주력했다. 이후 여성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아 학부 과정에 여성학 과정을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외국 대학들과 빈번히 교류하면서 한국 여성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인데, 데드라인을 1945년으로 해서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전공자 등이 저술한 시대사와 역시 각 분야 전공자들이 여성과 종교, 여성과 사회참여 등 분야별로 여성을 조명해보는 분야사로 이뤄진 ‘고대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 여성들’이란 책이었죠. 2년여를 타이핑하는 조교 한 명만 데리고 10여 차례 수정 작업을 거듭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안식년은 고사하고 방학 중에도 집에서 도시락을 날라 와 연구실에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몰두했어요. 그때 너무 고생해서 그런지 이후엔 글 쓰는 것 자체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그는 정년 때까지 교수로, 학자로 활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1976년 영역 작업을 마무리한 후 여성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부 여성학 과정 강의에 현장에서 뛰는 여성들을 초청해 삶의 여성학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도 변화를 체험하게 됐다. 

“가령, ‘여성과 노동’에선 은행원인 여성을 데려다가 취직·직급·보수 등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게 하고, ‘여성과 농촌’에선 서울대를 나오고도 근교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여성의 얘기를 듣게 하는 식이었죠. 학생들이 이 ‘필드(field)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눈이 반짝반짝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이렇게 교과서와 현장 얘기가 차이가 나는구나’ 체감하면서 학생들의 여성의식이 막 살아나는 것을 느꼈어요.”

1983년 한국여성개발원법이 대통령령으로 시행돼 여성개발원이 발족하면서 그는 초대 원장이 된다. 11대 몇몇 여성 국회의원들이 그의 활동을 보고 적극 추천한 결과지만 그는 내심 “3년 임기를 마치면 다시 대학에 돌아가리라”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두둑한 배짱으로 원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윤호미, 지영선 등 그를 잘 알던 여기자들이 그의 원장 임명 소식을 듣곤 너무 좋아하면서 축하 인사를 하러 그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초대 여성개발원장으로 여성문제 해결과 대안 마련에 주력

“여성개발원이 문을 연 것은 국가의 정식 예산 지원을 받아 여성의 문제 해결과 대안을 계획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죠. 여성개발원을 통해 현재의 여성발전기본법, 여성정책기본계획 수립 등의 기초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그렇지만 막 원장으로 부임했을 당시엔 사무실도,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상태였어요. 남산 극동호텔 맞은편에 있는 여성회관의 방을 하나 얻어 시작했다가 후에 여의도 빌딩의 일부를 빌렸죠. 당시 직원이 150여 명, 보사부가 소관 부처라 그쪽에서 직원들이 많이 왔죠. 노량진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별관도 있었고요.”

개발원의 기틀 닦기에 여념이 없던 그는 임기를 얼마 안 남겨두고 12대 국회에 ‘차출’된다. 보사부 장관의 전화를 받고 밤 11시에 장관 자택을 방문, “당(민정당)에서 연락이 왔는데 불가피하게 이번 12대 국회 전국구(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군사정권이던 때라 그 말을 듣자마자 막 떨리면서 ‘이건 징병이다’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요. 극구 사양하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남편은 지방 출장 중이라 연락도 안 되고, 당시 대학생이던 딸과 고교생이던 아들은 싫다고 난리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당신이 거절해 혹 밥벌이를 못하게 되면 우리 둘이 리어카라도 끌면 되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했어요. 내가 늘 학교로 돌아간다, 돌아간다 했거든요. 결국 국회의원이 되면서 학교 측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직했죠.”

국회의원이 된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뚝심 있게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의 의정활동 목표는 ‘여성을 위한 법 개정’이었다.

“우선 여성계가 꾸준히 추진해온 가족법 개정을 위해 의원 집까지 찾아다니며 국회 법제사법위 제출 서명 숫자를 채워 개정안 발의를 했어요. 이제나 저제나 법안 관련 뉴스가 나오길 기다렸지만 법안은 전문위원 손에서 위원장 손으로 넘어간 후 회의에 상정조차 안 됐어요. 한마디로 위원장 서랍 속에서 죽어버린 셈이죠. 후에 지금의 남녀고용평등법안을 처음으로 대표발의하게 됐어요. 이를 위해 여성 의원들뿐만 아니라 당내 여성들까지 조직해서 조항별로 전문가를 모셔다가 공부시키고 노동부의 자문도 구했죠. 그런데 막상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할 때가 되니 여야 간, 여성단체 간 이런 것 저런 것이 안 들어갔다 의견이 분분해 진통을 겪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전략적으로 70% 정도만이라도 뼈대를 갖추면 지금 통과시켜야 한다고요. 모자란 부분은 후에 개정을 통해 보완할 수 있으니까요. 이 법안은 일부 수정을 거쳐 1987년 통과돼 입법화됐는데, 내가 1985년 국회에 들어가 2년 만에 본 결실이었죠.”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건 연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고 있다. 언젠가 고 김대중 대통령이 한 여성단체 집회에 참석해 “우리 당이 가족법 개정을 이루어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곤 그를 끝까지 따라가 “그 개정은 단독으로 하신 게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여성계가 다루고 요구해서 이때 와서야 비로소 빛을 본 거죠. 그러니 다 협력해서 한 겁니다”고 ‘정정’한 고집도 여기서 나왔다.

정무(제2)장관 시절, 경찰대에 여학생 입학시켜

이후 그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설치한 정무(제2)장관실의 제2대 장관으로 발탁돼 1988년 말부터 1990년대 봄까지 재직하게 된다. 초대 조경희 장관의 짧은 임기 후였다. 재임 중 그는 특유의 강한 여성의식과 깐깐함으로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의 공직 의전 초청장에 등장하는 “동부인(同夫人)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표현에 강력 항의한 것. 당시 유일한 여성 국무위원이었던 그는 “여성 장관은 그림자가 아니고 더 이상 투명인간이 될 수 없다”면서 총무처(현 행정안전부)에 ‘동부인’ 대신 ‘동배우자’로 해 달라고 강력히 건의했다. 마찬가지로 부처 보도 자료에 ‘외교관 부인’이란 표현 대신 ‘민간 여성 외교사절’을 쓸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사소하게 보이는 용어 하나에도 여성정책 전담 부서라면 여성의식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장관으로 있으면서 지방의 여성 국장들을 불러서 브리핑을 하고 의견 교환을 하면서 유대를 가졌죠. 남자들 사회에 찌들려 국장을 겨우 하고 있던 차에 정무장관실이 모체 역할을 해주니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여성의 직업 기회 확대를 위해 각 분야를 살펴봤더니 경찰대학에서 여학생을 안 뽑는 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유가 여자 화장실이 없고, 여성은 완력 있는 범죄자를 다룰 수 없다는 통념 때문이란 것을 알고 경악했어요. 그래서 수차례 경찰청장을 찾아가 청소년을 다루는 등 여성 경찰이 할 일이 많다고 경찰대 여성 입학 허용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결국 여학생 입학이 허용됐는데, 입학 정원을 대여섯 명 정도로 제한하더라고요. 그래도 기뻐서 합격한 여학생들을 초청해 식사를 하면서 선물도 주고 격려했어요. 후에 이 첫 입학생 중 한 명이 서초구 반포의 파출소장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보람을 느꼈는지. 농협대학에도 여학생 불허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여성도 농사일을 많이 하니 당연히 여성을 넣어야 한다’고 설득해 결실을 보았죠. 당시엔 사관학교 여성 입학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와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 받아 마음껏 활동

그는 인생에 있어 자신을 잘 이해하는 두 남자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68세로 작고한 아버지(김능근 전 숭실대 교수)는 동양철학자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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