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
ⓒunsplash

“여기 좋은 거 있어. 같이 보자”

초등학교 2학년, 포르노를 보고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또래 여자 친구들이 포르노에 나온 여성처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들은 여전히 편했지만, 여자 친구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부모와 선생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고민을 나눴을 때 잘못에 대한 책임 추궁이 먼저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입을 닫기 시작했다. 단어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자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면 단답형으로 대꾸하는 정도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였다.

또래 여성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나는 친근감을 드러내는 방식도 서툴렀다. 우연히 비디오 가게에서 만난 같은 반 아이가 인사를 해도 무시하고 좋아했던 이성 친구가 내 감정을 눈치채고 다가올 때면 부정과 회피로 자리를 피했다.

남중·남고를 진학하며 또래 이성과 쌓을 수 있는 관계의 경험을 쌓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또래 여자 친구를 보며 말없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어른들은 숫기가 없다며 개인적인 성격으로 넘겼지만, 나의 섹슈얼리티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경험했던 포르노 영상에 머물러 있었다.

혼자 있을 때 곤조 포르노(성행위만 주로 집중해서 보여주는 포르노) 영상이 모여 있는 사이트를 몰래 접속해 성적 욕망을 해결했다. 처음에는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한 영상에 만족했다면 점점 더 자극적인 영상을 찾기 시작했고, 더 많은 영상을 보기 위해 포르노 사이트에서 결제까지 했다.

작가 jcomp ⓒ 출처 Freepik
작가 jcomp ⓒ 출처 Freepik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 전화요금 통지서로 날아오자 내 비밀은 금방 들통났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훈육의 권한을 아버지에게 넘겼다.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자초지종 듣던 아버지는 “남자가 그럴 수 있다”며 허무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위기를 겪고도 곤조 포르노를 기반으로 한 나의 섹슈얼리티는 여전했다. 친구들과 방법을 공유하며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을 방법을 찾고 실행에 옮겼다. 결제를 하지 않아도 ‘푸르나', ‘토렌트' 같은 P2P(파일전송 서비스)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료를 다운받고 부모님이 찾기 어려운 곳에 저장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기숙사에 들어가서는 PMP(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를 이용해 다운받은 포르노 영상을 친구들과 같이 보고 누구의 성기가 커졌는지 비교하며 놀기도 했다. 삐뚤어진 상상력이 날이 갈수록 발전했고 남자라면 이렇게 노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unsplash
ⓒunsplash

대학에 들어가서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 그 이면에 ‘또래 여자 친구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일주일 간 혼자 상황극 연습을 했다. 먼저 말을 걸어보자며 자기 암시를 했다. 다행히 적극적인 나의 태도에 친구들도 잘 호응해 줬고, 여자 친구들과 친구 사이로 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삐뚤어진 섹슈얼리티의 문제점은 연인 관계에서 드러났다. 내 욕심만큼 여자친구가 관심을 안 주면 몰래 클럽을 간다거나, 연락이 안 될 정도로 술을 마시며 네가 나한테 무관심했으니까 내 행동은 정당하다는 식으로 여자 친구를 못살게 굴었다. 관계를 인질로 상대를 지배하는 정복감은 포르노를 통해 답습했던 정복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포르노가 알려줬던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종종 과거를 떠올린다. 삐뚤어진 섹슈얼리티를 누군가 바르게 잡아줬더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21일 수원역 앞에서 여성의당이 성인 페스티벌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한 참석자가 '현실에서 포르노 찍는 성착취 행사 KXF, 수원시가 나서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여성의당
21일 수원역 앞에서 여성의당이 성인 페스티벌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한 참석자가 '현실에서 포르노 찍는 성착취 행사 KXF, 수원시가 나서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여성의당

나는 여전히 나의 섹슈얼리티가 두렵다. ‘습관이 불쑥 튀어나와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성기 삽입 중심의 섹스가 여전히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등 빈약한 상상력에 허덕이고 기존의 습관에 굴복할 때도 있다.

더구나, 4월 예정된 AV 배우들의 란제리 패션쇼와 사인회로 구성된 성인 페스티벌은 포르노 산업이 가상의 공간을 넘어 현실 세계까지 뻗쳐 노골적인 여성의 성적 대상화로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이끈다.

유혹의 손길이 뻗쳐 있는 사회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페미니즘이었다.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법, 무례하지 않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 가부장적 남성다움을 벗어난 ‘남성 해방'으로 얻는 이점을 페미니즘은 친절하게 알려줬다.

평탄한 길은 아니다. 성평등을 위한 발걸음엔 의심과 혐오로 가득한 시선도 따라다닌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어도 동료들과 고민을 나누며 페미니즘으로 삶을 재해석하고 목소리를 낼 때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다.

당신도 만약 나와 비슷한 고민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같이 나눠보는 건 어떤가.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