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벨리니의 오페라극 ‘노르마’

 “내가 탄 배가 난파한다면 다른 오페라는 그냥 두더라도 ‘노르마’만은 구해내려고 애쓸 것이다.”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1801~1835)는 자신의 작품들 가운데서 ‘노르마’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벨리니는 유려한 선율로 가에타노 도니체티, 조아키노 로시니와 함께 아름다운 목소리를 추구하는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적인 작곡가로 평가받던 인물이었다. 그런 벨리니를 대표하는 오페라극 ‘노르마’가 국내에서는 14년 만에 10월26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더구나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 제작이라 관심을 모았다.

흔히 ‘오페라의 역사를 바꾼 작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노르마’ 공연을 관람할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음역대의 노래들을 소화해낼 소프라노를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르마’는 일찍이 마리아 칼라스를 ‘불멸의 디바’라고 불리우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칼라스는 ‘노르마’의 어려운 고음역대를 아름다운 품격의 목소리로 부르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여 찬사를 받았다. 칼라스가 부르는 ‘정결한 여신’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가 바로 ‘정결한 여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칼라스의 열연과 노래에 힘입어 ‘노르마’는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공연들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2016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수천개 십자가가 무대를 감싸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2016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수천개 십자가가 무대를 감싸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 10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 10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하지만 ‘노르마’는 소프라노들에게 여전히 어려운 작품이다. 19세기에 인기를 구가했던 ‘노르마’가 20세기 들어 공연이 줄어들었던 이유로는 노르마 역을 소화하고 극에 나오는 노래들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가수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사정이 꼽힌다. 이 오페라에서 여주인공 노르마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벨라토 창법에다가 가장 고음역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요구된다. 노르마 역을 맡아 무대 위에 오를 소프라노가 그리 많지 않고, 그래서 ‘노르마’ 공연이 있게 되면 누가 노르마 역을 맡는가에 대한 관심이 따른다. 이번 한국 공연에서는 여지원과 데시레 랑카토레가 날짜별로 번갈아가면서 노르마 역을 맡았다. 세계적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가 발탁했다는 여지원도,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꼽히는 랑카토레도 내노라 하는 소프라노들이다. 고심하다가 랑카토레가 출연하는 날에 관람을 했다. 역시 노르마 역은 아무나 맡는 것이 아니었다. 랑카토레의 가창력은 정말 대단했다. 1막에 나오는 ‘정결한 여신이여’에서 매혹적인 노래를 들려주더니 내내 압도적인 성량에 고음역의 빼어난 아리아들을 들려주었다. 여지원의 노르마는 어땠을 까도 궁금했다. 

지난 10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 10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노르마’의 스토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갈리아의 켈트족은 드루이교의 지도자 오로베소와 그의 딸인 여사제 노르마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노르마는 로마군 사령관인 폴리네오와 몰래 사랑을 나누어 두 아이까지 낳아 숨겨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점령군에 맞서 싸우려는 아버지 오로베소의 뜻과 달리 평화를 지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노르마에 대한 사랑이 식은 폴리네오는 변심해서 노르마의 시중을 드는 아달지사를 사랑하게 된다. 아달지사의 고백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노르마는 폴리네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치솟지만, 폴리네오를 설득해서 노르마에게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아달지사의 말을 믿고 기다린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가 되자 자신을 기만한 아달지사를 향한 분노가 폭발한다.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했던 노르마는 분노하여 군중들 앞에서 로마 점령군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 와중에 폴리네오는 아달지사를 데려가려고 침투했다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끌려온다. 노르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폴리네오와 단둘이 담판을 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에 노르마는 군중들을군중들을 소집해서 신의 뜻을 어긴 여사제가 있다며 고발하겠다고 한다. 군중들이 그녀가 누구인지 밝히라고 외치자 뜻밖에도 노르마는 그것은 바로 자기라고 밝힌다. 분노한 군중들 앞에서 노르마는 화형대를 준비해 달라고 한다. 불길에 몸을 던지려고 가던 노르마는 아버지 오로베소가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는다. 원작에는 노르마가 화형대에서 죽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온다.

‘노르마’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갖춘 예술적 품격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만들기에 따라서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로 이어지는 치정의 스토리 라인으로 가져갈 수도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알렉스 오예가 연출한 이번 ‘노르마’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작품의 낭만주의적 색채는 절제되는 대신, 광신주의적이고 맹목적인 규범들을 강요받는 개인의 인간적 고뇌를 담고 있다. 종교는 권력의 도구이자 자신의 규범에서 어긋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노르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사제로서의 역할과, 사랑에 갇혀 있는 인간적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노르마는 사랑에 휘둘리고 배신에 상처받는 연약한 존재이면서, 분노의 전쟁을 선포하고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용기를 가진 강하고 능동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흔히 여주인공이 피해자로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과는 달리, 주어진 비극적 삶 앞에서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상이 부각되기도 한다.

알렉스 오예는 노르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오페라 초반에서 노르마는 높은 지위 덕분에 세상의 정상에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미끄러져간다. 노르마는 어쩌면 어려움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조국과 종교에 대한 반역자로 보기도 하지만, 노르마의 죄는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빠진 것? 엄마가 된 것? 둘 다 그렇게 중대한 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노르마의 가장 큰 죄라고 한다면, 파괴와 전쟁을 광적으로 요구하는 신의 품 안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종교에 중독된 사회에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한 것이다.” 

지난 10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 10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노르마는 국가가 요구하는 규범을 넘어서면서 행복하고자 했던 여성이다. 자신이 지켰던 사랑과 우정이 배신당했지만, 남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스스로를 심판하며 고귀한 자존을 지킨 인물이다. ‘노르마’는 국가의 강요에 맞선 개인적 비극의 상징이며, 종교와 사회의 편협한 규범 앞에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의 모습을 빼어나게 그리고 있다. 그러니 ‘노르마’는 로마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의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연출가 오예는 전통적 해석에 걷히지 않고 과감하고 현대적인 연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노르마는 드레스가 아닌 바지를 입고 나오고, 병사들도 현대 군인들의 복장이다. 소파가 있는 거실, TV와 총이 등장한다. 오페라극을 현대화 하는 요즘 트렌드와 맥을 같이 한다. 오페라극을 무대를 이렇게 현대적으로 바꾸는데 대해서는 언제나 관객들의 호불호가 엇갈린다. 로마 군대와의 결전을 외치는 극인데 현대적 복장을 입고 연기하는 모습이 낯설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화형대의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 가는 노르마를 굳이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바꾼 장면은 노르마의 자기 결단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디테일한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찾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전하려 했던 연출가의 생각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3500여개에 이르는 십자가를 전면에 배치한 화려한 무대도 압권이다. 여사제 노르마의 신분을 알려주는 장치일 수도 있고, 경건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오브제일 수도 있다. 화형대로 가는 노르마의 자기 희생을 상징하는 장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십자가들이 날카로운 가시 철망들처럼 보일 때는 힘든 우리들의 삶을 표현하는 상징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 많은 십자가들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관객들의 몫이다.

“정결한 여신이여, 당신은 은으로 물들입니다/ 이 거룩하고 오래된 나무들을/ 우리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소서/ 구름도 없고 베일도 없이/ 진정시켜 주소서, 오 여신이여/ 당신께서 진정시켜 주소서 불타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소서 무모한 열정을/ 뿌려주소서 땅위에도 같은 평화를/ 당신이 하늘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백성들과, 자신이 사랑했던 로마 사령관 폴리네오 사이에서 고뇌하던 노르마. 그녀는 평화를 갈구하며 ‘정결한 여신’을 간절하게 부른다. 하지만 노르마가 마주해야 했던 것은 사랑도 평화도 아닌 화형대였다. 비극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인간의 숭고한 정신과 품격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