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1917∼1990)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2세대 서양화가이다. 서양화에 동양적 정신과 형태를 더해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장욱진의 그림을 보기 위해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1920년대 학창 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60여 년간 펼쳐온 장욱진의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판화,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을 한 자리에서 조망하고 있다. 시기별로 구분된 4개의 전시실을 돌아보면 장욱진 미술의 변천 과정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복되는 소재들이 몇 가지 있다. 까치, 나무, 해와 달, 마을, 집과 가족, 그리고 자신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보이는 일상적인 풍경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그의 그림들이 유난히도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생활과 가까이 있는 소재들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소재들은 작품마다 다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찾아가면서 고정되지 않는 변화를 늘 추구했던 작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화상, 1951, 종이에 유화물감, 14.8×10.8cm, 개인소장, Self-portrait, 1951, oil on paper, 14.8 × 10.8cm, private collection
자화상, 1951, 종이에 유화물감, 14.8×10.8cm, 개인소장, Self-portrait, 1951, oil on paper, 14.8 × 10.8cm, private collection.   

첫번째 전시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 <자화상>이다. 한 뼘 크기의 작은 종이 위에 유채로 그린 아주 작은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은 작지 않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한국전쟁기인 1951년. 서울 광화문 근처에 살았던 장욱진의 가족들은 언제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지냈다. 결국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부인만 그곳에 남고 장욱진과 딸, 아들은 충남 연기군으로 가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 무렵에 그린 것이 <자화상>이다. 그림에 나오는 콧수염을 기른 모던한 모습의 남자가 장욱진 자신이다. 입고 있는 옷은 결혼식 때 입었던 하이칼라 프록코트. 황금빛 벼 이삭들과 붉은 논두렁 길이 있고 청록색 하늘에는 구름들이 떠 있다. 귀향하는 장욱진의 뒤로 검둥개와 새들이 함께 뒤따르고 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려진 그림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평화롭고 서정적인 풍경이다. 장욱진은 전쟁의 공포를 느끼지 못할 만큼 무사태평한 인물이었던 것인가. 그 반대였다. 전쟁 속에서 장욱진은 많이 고통스러워하며 고독과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그림을 통해 자신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표현한 것이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옷을 다시 그리며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린 것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과 슬픔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연이 많은 작품이다. 장욱진 스스로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에 오색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가족〉, 1955, 캔버스에 유화물감, 6.5x16.5cm,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1955, 캔버스에 유화물감, 6.5x16.5cm,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은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면 “나는 심플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는 의미라고 스스로 말했다. 그의 그림은 일상적인 소재들을 갖고 간결한 구도와 독특한 색감으로 그려졌다. 마치 어린 아이들의 그림 같다. 그림만 ‘심플’했던 것이 아니다. 삶도 단순함을 추구하며 살았다. 번잡한 도시 생활을 떠나 외진 곳으로 가서 작업에 몰두했다.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렸고, 그림 그리기를 마치면 술을 마시러 갔다. 오직 그림에 몰두한 삶이었고, 부와 명성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심플하다. 술 먹은 죄밖에 없다!”고 절규하던 스승, 탐욕과 싸우고, 욕심 많은 사람을 경멸하던 스승의 모습을 제자였던 조각가 최종태는 기억한 적이 있다. (최종태,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

그렇게 심플한 삶을 살아서였을까. 장욱진의 그림에는 가족도가 유난히 많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미안함이 담겨있다. 돈이 되는 일은 거들떠보지 않았던 화가였기에 생활은 쪼들렸다. 한 달 술값 정도에 불과한 교수 월급에, 생계는 부인 이순경이 도맡아 꾸려가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은 그림들로 나타난다. 장욱진의 평소 가족들에게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라고 말하곤 했다. 많은 가족도 가운데서 이번 전시회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그림이 1955년에 그려진 <가족>이다. 장욱진의 첫 가족도인데, 일본인 사업가에게 판매된 이후 공개된 적이 없다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60년 만에 출품된 작품이다. 장욱진이 항상 머리맡에 걸어둘 만큼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고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매한 작품이다.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화 물감, 41 × 31cm, 개인소장, Night and an Old Man, 1990, oil on canvas, 41 × 31cm, private collection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화 물감, 41 × 31cm, 개인소장, Night and an Old Man, 1990, oil on canvas, 41 × 31cm, private collection

장욱진이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그린 <밤과 노인>(1990)은 생의 마지막 무렵에 그가 가졌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림이다. 왼쪽 상단에는 흰 도포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인이 있다. 죽음이 멀지 않은 장욱진 자신이다. 그림 오른쪽에는 화가가 사랑했던 집, 까치, 나무, 아이가 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표정의 노인은 하늘로 날아가고 있지만 그가 사랑했던 것들은 땅에 있다. 그림 한가운데서 까불고 있는 아이는 젊은 시절 철없던 자신의 모습일 게다. 노인은 죽음으로 가고 있지만 슬퍼하지 않고 초연하다.

1970년대 이후 노년기에 들어 장욱진의 작품 세계는 큰 변화를 나타낸다. 마치 먹으로 그린 동양화를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동양의 정신과 형태를 일체화시킨 그의 그림은 『금강경』의 핵심 사상인 '무상'(無相)으로 집약된다. 하늘로 둥둥 떠다니며 공중 부양하는 사람들, 시공간을 초월한 그의 말년작들은 모든 집착을 떠나 초연한 지경인 '무상'을 드러낸다. 말년으로 갈수록 깊어진 그의 성찰과 내면의 세계는 ‘무상’의 작업으로 이어져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욱진은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꿈을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화가였다.

장욱진의 큰 딸 장경수는 『내 아버지 장욱진』에서 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생을 걸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작품이 많다거나 꾸준히 일기 쓰듯이 그렸다는 뜻이 아니다. 평생 붓대를 놓은 적이 없다는 당신의 말씀은 작품 수가 많다는 게 아니다. 오로지 그림만을 위해 숨 쉬고 그림에만 몰두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이 반드시 그려야 할 그림이 아니라면 그리지 않으셨다. 그림이 안 되면 고통스럽게 4년이나 그리지 못하셨지만 쉽게 여기저기 휩쓸리지 않으셨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업을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라고 말했다. 목 디스크로 힘들어진 몸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서서 점화의 한점 한점을 그리고 있던 김환기,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던 박서보. 그리고 지금 고백하고 있는 장욱진. 우리의 화가들은 그림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불태우는 성실함에서 어쩌면 이렇게 하나 같았을까.

장욱진의 그림들을 보면 그의 삶이 나타난다.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分身)은 없다. 난 나의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나를 녹여서 넣는다. 나를 다 드러내고, 발산하는 그림처럼 정확한 놈도 없다.” (장욱진, 「마을」, 『조선일보』, 1973. 12. 8.) 그래서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가장 진지한 고백’이다.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진정성이 있다. 삶과 작품의 일치가 느껴지기에 작은 소재들 속에서도 화가의 진정성이 전해진다. 장욱진이 떠난 지 30여년이 흘렀지만,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잡다한 얼룩과 찌꺼기들이 많다. 기쁨, 슬픔, 욕심 집념들이 엉겨서 열병처럼 끓고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지워 간다. 다 지워 내고 나면 조그만 마음만 남는다. 어린이의 그것처럼 조그만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돼야 붓을 든다." (장욱진, 「경향화랑」, 『주간경향』, 1979. 10. 7.)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은 내년 2월 12일까지 계속된다. 그의 작품들을 찾아갈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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