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앨라모고도 사막의 기지에서 행해진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폭발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로 떠오르자 ‘트리니티’(Trinity)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기뻐하며 환성을 질렀다. 실험을 이끌었던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또한 성공에 들뜬 얼굴로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오펜하이머는 이내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떠올린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그 순간, 킬리언 머피는 기쁨과 불안, 환희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내면을 생생하게 연기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을 했던 천재 과학자를 엄습한 의식의 분열이다

영화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그러나 영화는 핵폭발 실험이 성공해도 흥분하지 않는다. 영화의 하일라이트격인 폭발 장면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냉정한 절제력을 보인다. 놀란은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고 재래식 폭약을 폭발시켜 트리니티 실험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막상 핵이 폭발하는 장면은 열광적이지 않고 건조하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엄청난 폭발의 굉음은 몇 초의 시차를 두고서야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세상을 뒤흔들 듯 요동쳐야 할 순간에 나타난 무음의 시간은 관객들로 하여금 아직 터져나오지 않은 앞날에 대한 불안을 예고한다. 핵무기의 등장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인가도 시간이 지나서야 실체를 드러냈던 것과 같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연구원들의 환영에 화답하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놀란 감독은 핵폭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는데 몰입하면서도 정작 심리적 거리를 두는 제3자적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핵폭발 실험 성공의 의미를 객관화 한다. 트리니티 실험 성공 연설을 듣던 청중들의 환호와 발 구르는 소리는 오펜하이머의 고통으로 반전된다. 박수 갈채는 폭발음이 되어 들리고 원폭의 섬광은 청중들의 살갗을 찢어내며, 거리에서는 방사능을 맞아 주저앉고 구토하는 사람들의 환청과 환각에 오펜하이머는 고통스러워 한다.

성공과 함께 고통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연 성공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영화 ‘오펜하이머’는 ‘악마와의 거래’에서 결국은 실패한 과학자의 얘기이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말처럼, 오펜하이머가 학살 무기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파우스트의 거래 같은 것’이었다.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 역시 거래의 조건을 재협상하려고 시도했지만, 바로 그런 행동 때문에 박해받고 배제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오펜하이머가 맺었던 계약에는 애당초 ‘군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워싱턴의 권력자들에게는 “각하, 제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라며 겁에 질려 징징대는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이 표현한대로 “울보 과학자”일 뿐이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이전에 이미 권력자들에게 속았다. 그는 일본에서의 전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워싱턴의 군사정보 부대가, 일본 정부는 전쟁이 패배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항복 준비를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도청하고 해독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트루먼도 이미 일본이 항복하기 일보직전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은 만약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사용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미 패배한 일본에게 그대로 원폭을 투하한 상황은 전쟁이 끝난 후 오펜하이머로 하여금 자신이 속았다고 믿게 만들었다. 어쩌면 오펜하이머가 군축을 위한 여론 활동을 그토록 강력하게 했던 것도 자신이 속아넘어간데 대한 반작용이었을지 모른다.

핵무기의 존재가 전 세계에 위협이 될 것이며,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믿은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끝나자 군축 요구에 적극 나선다. 정반대로 미국의 핵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믿은 세력에게 오펜하이머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보안 청문회에 회부돼 원자력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당한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군축의 아버지’가 되려던 행보는 제동이 걸리고 오펜하이머는 매카시즘의 희생자가 되어 정부 자문위원회로부터 축출당한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를 내모는 청문회 장면은 영화 후반부의 압권이다. 컬러와 흑백 화면을 번갈아 오가는 기법은 청문회 장면의 긴박감을 갈수록 고조시켜 나간다. 놀란 감독은 컬러 장면에서는 오펜하이머가 바라보는 시선을, 흑백에서는 오펜하이머의 건너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 두 가지 화면에서 오펜하이머의 입장에 갇히지 않고 객관적 시선을 보여주려는 놀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중심적 사건임에도 그 장면을 한 컷도 담지 않은 놀란 감독의 참을성도 대단하다. 원폭 실험이 성공했으니 그 다음에 예상되는 영화의 장면은 원자폭탄을 실은 비행기의 출격, 혹은 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의 참상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영화에는 일본이나 일본인의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놀란 감독의 이런 연출은 ‘오펜하이머’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전쟁영화가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놀란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핵무기 시대를 열었으면서도 결국 실패해야 했던 오펜하이머가 겪은 내면의 복잡한 갈등이었다. 감독은 자신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관객들을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 몰입시킨 뒤 이끌고 가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측가능하고 상투적인 장면들을 제외함으로써 놀란은 자신이 생각하던 메시지의 전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30대 후반의 루드비히 고란손이 만든 음악이다. ‘오펜하이머’로 제91회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고란손은 놀란 감독이 자신에게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곡을 써달라고 요청했음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바이올린은 표현력이 풍부한 악기라 아름다움에서 공포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놀란의 생각이었다. 놀란의 예상은 정확했고, 고란손은 놀란이 원하던 것을 120% 담아냈다. 고란손은 현악기 소리 위에다가 신디사이저 소리를 입히고 다듬어 나갔다. 현악기의 선율은 아름다웠다가 혼란스러웠다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가 하면서 인물들의 내면적 분열을 표현한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의 배경 음악은 인물들이 겪는 감정적 딜레마를 관객들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고란손의 음악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지성과 감정을 잘 표현해냈다”고 놀란은 만족했다. 놀란은 비주얼로 인물들의 깊은 내면을 표현해냈고, 고란손은 음악으로 이를 표현해낸 것이다.

180분의 상영 시간이 너무 길다는 반응들도 있다.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면서 오펜하이머의 내면적 갈등을 표현하는 대서사에는 사실 그 시간도 부족해 보인다. 놀란은 사실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마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과도 같은 대서사를 180분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원작을 읽으면 막상 영화 가운데 들어낼 부분이 없음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두 저자는 25년 동안의 답사와 인터뷰, FBI 문서 열람 등을 거쳐 이 책을 썼다. 최근 국내에 나온 ‘특별판’도 1056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책’이지만 영화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허구가 아닌 자료에 기초해서 쓴 책이니 당시의 상황들, 특히 오펜하이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영화를 보고서 뭔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영화 마지막에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과 얘기를 나눈다. “알버트, 파멸의 연쇄 반응이 이미 시작된 것 같아요.” 자신이 낸 길이 결국 ‘파멸의 연쇄 반응’이었다면 오펜하이머에게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그가 핵폭탄 개발에 참여하지 않고 히틀러가 먼저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면 인류에게는 어떤 재앙이 닥쳤을지 상상할 수 없다. 오펜하이머가 먼저 핵무기를 만든 일은 최악의 상황을 막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최악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재앙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누군가는 핵무기를 만들 것이 시간문제였으니, 오펜하이머에게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일까. 영화는 여전히 여러 질문들을 남겨놓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한 방황하느니라.” 오펜하이머의 방황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파우스트의 방황은 천상의 구원을 받았지만, 오펜하이머의 방황은 버림받은 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우리는 핵전쟁 위협에 처한 당사자이기에 그의 방황과 실패의 서사가 남의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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