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파블로 피카소

최근에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가우디 투어’였다. 1926년에 사망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는 이제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구엘 저택, 구엘 공원 등 가는 곳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관람하려는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특히 141년째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의 독창적인 건축술이 낳은 아름다움이 장관이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였다. 가우디가 카탈루냐 지역에서 유명세를 타며 건축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구엘이라는 후원자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구엘 같은 부자들의 요청에 따라 건축을 한 가우디를 경멸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같은 시기를 살았던 화가 파블로 피카소였다.

파블로 피카소, 기아(Hunger), 1902, 바르셀로나 피카소 뮤지엄 소장.
파블로 피카소, 기아(Hunger), 1902, 바르셀로나 피카소 뮤지엄 소장.

피카소가 20대 초반에 그린 펜화 ‘기아’(Hunger)는 가우디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그림의 왼쪽 앞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가족이 보이고, 언덕 위에는 턱수염에 허름한 옷을 입고 대중에게 설교하는 남자 건축가가 있다. 건축가는 말한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하느님과 예술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배가 고파 눈빛이 흐려진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네, 원한다면 하느님과 예술에 대해 말씀하십시오. 그런데 제 자식들은 지금 배가 고프답니다.” 좌파였던 피카소의 눈에 가우디는 부자들의 집만 짓는, 부자들을 위한 건축가였다. 마침 가우디가 호화롭게 건축한 구엘 저택 바로 앞에 피카소가 살았으니, 그런 호화 저택을 볼 때마다 가우디가 못마땅했을 법하다. 피카소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만일 오피소(가우디의 제자)를 보거든 가우디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모두 지옥에 보내달라고 해."

그런데 정작 가우디는 일생 동안 건축을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 교회로부터 공사비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늘 공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말년에는 부자들을 위한 건축물은 짓지 않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모든 것을 쏟았다. 가우디에게 이 성당의 건축은 악한 세상에서 윤리를 세우는 종교적 권위를 갖는 성전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가우디는 74세 때 걸인 차림으로 길을 가다가 전차에 치어 사흘 후에 사망한다. 누구도 그런 거지 차림의 사람이 가우디인줄 알지 못했다. 가우디는 뒤늦게야 치료를 받았지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가우디의 마지막은 그렇게 고독했다.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독신으로 살았고 너무도 독창적인 탓에 ‘괴짜’ 취급을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그리 많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가우디의 전기 작가였던 라폴스는 “가우디는 카타르시스적인 고난과 고통을 인내하며 청빈하게 살았다”며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라고 가우디를 칭송했다.

반면 젊은 시절 가우디를 그렇게도 비난했던 피카소의 인생은 유난스럽고 화려했다. 피카소는 수많은 여성 편력을 드러낸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흔히 피카소의 ‘일곱 여인’을 꼽지만, 법적인 부인은 올가 코클로바와 자클린 로크 두 여성 뿐이었다. 첫번째 부인 올가는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와 바람을 피우고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그러나 피카소는 재산을 분할하고 양육비를 주는 상황을 피하려 했고, 그래서 올가는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오랜 세월 법적으로는 부인으로 붙잡혀 있어야 했다. 피카소와 올가의 손녀 마리나 피카소는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라는 책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놓은 덫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나가는 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나의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의 피와 나의 피,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기며 피카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의 피를.”

피카소, 우는 여인, 1937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소장.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의 고통받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 우는 여인, 1937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소장.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의 고통받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와 연인관계일 때 사귄 도라 마르는 피카소를 향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당신은 화가로서는 비범할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쓰레기야.” 피카소는 다섯번째 연인이자 뮤즈였던 도라를 9년 동안 만나면서 그녀의 초상을 60여점이나 그렸다. 잘 알려진 ‘우는 여인’도 도라를 그린 것이었다. 피카소는 “나에게 그녀는 우는 여인이었다. 몇해 동안 나는 그녀를 고통받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했다. 하지만 도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한 모든 초상은 거짓이다. 그것은 피카소가 만들어낸 피카소의 모습이지, 단 한 점도 내 모습이 아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도라는 자기를 그린 피카소의 그림들을 가학적인 조롱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피카소는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피카소가 62세에 만난 여인이 21세의 프랑수아즈 질로였다. 당시 피카소는 부인 올가와 법적으로 별거 상태였고 마리와 동거하다가 다시 도라를 사귀고 있었다. 피카소와 아들 딸 낳고 살면서 10년의 세월을 함께한 프랑수아즈였지만, 피카소의 바람기와 구타에 분노하여 그를 떠난다. 그 뒤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폭로한 『피카소와 함께한 삶』을 출판하여 피카소의 격분을 샀는데, 피카소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하고 만다. 그래도 피카소는 프랑수아즈가 낳은 자식들을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키는 복수를 했다. 피카소와 관계를 맺었던 많은 여인들이 우울증, 자살 등 비참한 나락으로 빠졌다. 반전 작품 ‘게르니카’ 등을 그리며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던 피카소였지만, 정작 자신은 여인들에게 잔인한 삶을 살았다. 모순덩어리의 삶이다.

그렇다고 피카소가 과대포장된 ‘난봉꾼’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서는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일 벌레’였다. 평생 5만여점의 작품을 남긴 피카소는 평소 “나는 일을 할거야. 일을 해야 해”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마지막 부인이었던 자클린은 “피카소에게 일은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필요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피카소는 그림에 대해서는 늙어서까지도 성실한 인물이었다.

피카소가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반전운동을 하면서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사망하자 추모의 초상화를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에 실었지만, 스탈린을 이상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공산당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평론가들로부터는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학살의 주체를 모호하게 그렸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피카소는 종종 공산당과 불협화음을 빚었지만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 게르니카 폭격의 참상을 담은 이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의 여인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와 마리 테레즈로 해석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 게르니카 폭격의 참상을 담은 이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의 여인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와 마리 테레즈로 해석되고 있다.

화가 피카소의 천재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지만 인간 피카소의 삶은 논쟁적이다. 예술적 성취에 상관없이 그는 자신이 가까이한 여성들에게 잔인했던 ‘나쁜 남자’였다. 상습적인 불륜과 가학을 반복했던 사람이 좌파운동가였다는 사실은 특히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면일 것이다. 그렇다고 피카소가 성실한 화가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개의 인간들이 그렇듯이 피카소의 삶에는 서로 다른 여러 측면들이 혼재되어 있다. 우리는 피카소의 여러 얼굴 가운데 어떤 얼굴을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일까. 스페인의 어느 미술관을 가도, 파리의 미술관들을 가도 피카소는 대세였다. 역사는 예술적 성취를 우선하는 모습이다.

다만 가우디가 그런 피카소로부터 경멸 받은 것을 억울한 일이었다. 너무나 독창적이었기에 당대 보다는 사후에야 인정을 받았고 고독한 말년을 보냈던 가우디. 그에 비한다면 여인들에게 둘러싸이고 명성과 부를 얻었던 피카소의 삶은 화려했다. 『피카소와 함께한 시간들』의 저자 조르주 타바로는 “과연 피카소만큼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영광을 누린 화가가 있었을까?”라고 반문한다. 공산주의자 피카소의 삶은 화려했고, 부자들의 집을 만들던 가우디의 삶은 고독했다. 묘하지 않은가.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봐야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두 사람의 엇갈린 삶은 말해주고 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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