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준 작가
김장을 담근 지 벌써 5년째다. 김장 김치가 있는 집과 그때그때 마트에서 김치를 사 먹는 집은 삶의 품격이 다르다. ⓒ편성준 작가

아내는 며칠 전부터 수첩에 메모를 하고 액셀에 숫자들을 써넣었다. 김장을 하는 주간이 되면 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나는 아내와 함께 시장으로 갈 준비를 한다. 올해는 돈암시장의 단골 야채가게로 가서 무와 열무를 주문했다. 지리산 황치골에서 보내온 절인 배추가 이미 마당에 놓여 있었다. 시장에 가면 아내는 신중해진다. 우리 두 사람과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이 먹을 김치의 재료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장한 지 벌써 5년째다. 요즘은 마트에만 가면 사시사철 식재료가 다 있는데 왜 김장을 하느냐고?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시라. 김장 김치가 있는 집과 그때그때 마트에서 김치를 사 먹는 집은 삶의 품격이 다르다.

우리의 식생활이 크게 바뀐 것은 아내가 지리산에 있는 요리학교에 가서 장 담그기와 김장하는 법을 배운 뒤부터였다. 그전까지 나는 간장과 된장이 한 항아리에서 숙성되다가 ‘장 기르기’라는 과정을 통해 분리되는 것도 몰랐을 뿐 아니라 좋은 재료로 정성스럽게 만든 김치와 김치공장에서 수입산 재료로 만드는 김치가 얼마나 다른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가 아내가 지리산에서 1박 2일로 진행되는 요리 수업을 기획하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아내는 기획자로서만이 아니라 그 학교의 학생으로 2년을 살았다. 그 이후로 우리 집 장독대의 된장과 간장은 향기롭고도 깊은 맛으로 식탁을 바꾸어 주었다.

서둘지 않고 천천히 하기
세 여성과 함께 김장하기

아내는 3년 전부터 11월 말이나 12월 초가 되면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김치를 담갔는데 한옥으로 이사를 오게 돼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마당에서 김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했다. 어쩌면 한옥으로 이사를 온 이유가 김장 때문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김장은 며칠 전부터 준비해야 하고 특히 당일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금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므로 늘 심신을 지치게 했다. 아내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작년 김치로 김치밥을 해주었다. 마지막 남은 김치로 밥을 하는 것이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김장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하기’가 목표라고 선언한 아내는 10시쯤 도착한 친구들에게 드립 커피부터 한 잔씩 내려주었다. 커피잔을 손에 든 친구들도 시간 많으니 천천히 하자며 웃었다. 하지만 막상 알타리를 다듬기 시작하자 일손이 바빠졌다. 내가 맡은 일은 쪽파 다듬기였다. 여성들이 마당에 나가 무와 알타리를 다듬는 동안 나는 마루에서 톰 웨이츠의 올드팝을 틀어놓고 쪽파를 다듬었다. 도중에 아내가 들어와서 “아유, 뭐 씻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쪽파를 잘 다듬네”라고 칭찬했지만 일을 더 시키기 위한 ‘당근 전략’일 뿐이었다.  

ⓒ편성준 작가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없어도 수육을 삶아 방금 만든 김치와 함께 마시는 와인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편성준 작가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일 년 먹을 음식 장만하기

다듬은 식재료들을 큰 통에 넣고 무생채에 고추장, 마늘, 고춧가루 등 양념을 버무리는 동안 사람들은 지쳐갔다. 나는 장갑 낀 두 손에 빨간 김칫소 양념을 묻힌 채 서서 일하는 세 여성 사이에서 잔심부름하느라 동분서주했고 이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아내는 지치고 신경이 곤두서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전에 내가 책에 썼던 대로 ‘아내가 김장하면 남편은 긴장한다’는 구절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나를 정육점으로 보내 삼겹살을 사 오게 했다. 페스코 베지터리언인 아내가 집에서 고기를 내는 날이 딱 하루 있는데 바로 김치를 담그는 날이다.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없어도 수육을 삶아 방금 만든 김치와 함께 마시는 와인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와인잔을 부딪치며 “내년 김장은 언제 할까?”라고 묻던 아내가 와하하 웃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다시는 김장 안 한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새 힘든 걸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김장하는 게 꼭 김치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고생하면서 일 년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일 자체에 더 큰 보람을 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새로 만든 겉절이에 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어제 당신 고생했어. 내 신경질 다 참아주느라”라고 말하면서 김장하느라 쓴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세 집이 합해 98만8000원이 들었다고 하길래 “와, 2000원 빠지는 100만원이네!”라고 했더니 아내가 ‘1만2000원 빠지는 100만원’이라고 정정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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