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한 레시피] '설거지를 잘하는 남편'이 된 사연  
[아내를 위한 레시피] '설거지를 잘하는 남편'이 된 사연  
  • 편성준 작가
  • 승인 2022.10.06 08:20
  • 수정 2022-10-06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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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편성준 작가 제공
집에서 아내는 주로 밥을 하고 나는 설거지를 한다. 내가 요리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이렇게 가사 분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설거지를 잘하게 된 이유를 찾자면 멀리 군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진=편성준 작가 제공

아내는 내가 세상에서 능숙하게 다루는 게 딱 두 개라며 놀린다. 하나는 펜이고 다른 하나는 수세미다. 펜을 잘 다룬다는 건 작가인 내겐 고마운 칭찬이다. 요즘은 대부분 PC나 노트북,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서 글을 쓰지만 나는 펜으로 메모하는 걸 좋아하고 또 '공처가의 캘리'를 쓰기 때문에 아직도 종이 위에 글씨를 쓸 일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수세미는 내가 유난히 설거지를 좋아하고 또 비교적 잘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집에서 아내는 주로 밥을 하고 나는 설거지를 한다. 내가 요리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이렇게 가사 분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설거지를 잘하게 된 이유를 찾자면 멀리 군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내가 군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식기 당번'이 있었다. 사실은 그때도 공식적으로는 철저하게 '개인 식기'를 실천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 뿐이었고 중대마다 엄연히 식기 당번이 존재했다. 주로 상병이 맡게 되는 식기 당번은 식기만 닦는 게 아니라 중대의 핵심 군번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선임병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화를 내고 싶을 때는 식기 당번부터 '갈구는' 게 순서였다. 그럼 그 효과는 바로 아래 군번들에게 나타난다. 그런데 나는 식기 당번이면서도 이병 일병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고 바로 위의 정 병장은 그런 나를 대놓고 싫어했다. 군인답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가 군인다운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내가 정 병장에게 더 찍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업용 소뼈로 만든 기름을 라면에 썼다는 얘기가 돌면서 라면 파동이 일어났는데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 라면이 군대로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배급되던 컵라면이 '하루에 두 개씩'으로 늘어나자 우리는 "아니, 군인들은 뭐 공업용 우지 라면을 먹어도 된단 말이야?"라고 화를 내는 척하면서도 좋아했다. 밤이면 내무반에서 몰래 라면을 끓여 먹는 건 군생활의 은밀한 일탈이었으니까. 그런데 밤이 되니 정 병장이 자신의 컵라면을 꺼내면서 "야, 밑에 애들은 그냥 자라"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분개해서 "아니, 병장들만 지금 라면을 끓여 먹으면 이병 일병들은 언제 라면을 먹는단 말입니까?"라고 일갈하고는 후임병들을 깨워 같이 라면을 먹게 했다. 일종의 항명이었다.

덕분에 식기 당번을 오래 해야 했다. 정 병장이 식기 당번을 다음 군번으로 넘기지 않아서였다. 나는 동기조차 없는 간편중대 소속이었고 혼자 식기 당번을 오래 하다 보니 설거지 솜씨가 놀랍도록 좋아졌다. 당시 군인들에게 주어진 식기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이라 가벼웠는데  세제로 깨끗하게 씻어내는 게 설거지의 일차 공정이라면 이차는 물기를 깔끔하게 털어 착착 쌓는 것이었다. 세면장 수돗가 턱에 살짝 젖은 수건을 두 번 접어 깔아놓고 식기를 터는 모습은 식기 당번이면 누구나 연출하는 장면이었고 나는 특히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능숙해서 나중엔 다른 중대 사람들이 일부러 구경을 올 정도였다. 한 번은 군단에서 안면이 있는 식기 당번들끼리 장난 삼아 시합을 한 적도 있는데 거기서도 내가 일등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솜씨가 빠르고 좋았다.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설거지 후 뒤처리도 깔끔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아내를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남들은 군대 제대하면서 다들 딴다는 태권도 초단도 따지 못한 주제에 엉뚱하게 설거지 솜씨만 연마해 오다니, 하는 눈치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군대 가서 나라를 지키다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설거지를 하다가 오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덕분에 아내와 살면서 설거지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사니 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 군대, 직장, 학교 등 모든 일과 장소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비가 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설거지를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 나는 설거지를 잘하는 남편이니까.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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