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 성추행 사건’
청와대·민주당·서울시
‘피해자’ 지우고 ‘피해호소인’
여가부, 피해 회복 돕겠다더니
‘피해 고소인’ ‘고소인’ 사용
서울시, 진상조사단 꾸린다며
‘성추행’은 언급조차 안 해

사용전력 찾기 힘든 낯선 단어
"일방적 주장 셈치고 싶은
속내 드러냈다" 비판 나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홍수형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사라졌다.

‘피해자’ 대신 ‘피해 호소인’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는 피해자의 증언을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담은 표현이라는 비판이 잇따른다.

15일 서울시는 성추행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며 피해자 A씨를 ‘피해 호소 직원’이라고 불렀다. A씨가 겪은 성폭력 피해 경험은 전부 ‘피해’라고만 표현했다. 박 전 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 당한 상황이지만 성추행이라는 표현은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성추행이 빠진 자리에는 ‘인권침해’가 자리했다. 이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당대표로서 다시 한번 통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A씨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불렀다. 

14일 민주당 여성의원들과 여성가족부의 입장발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여성의원들은 당 차원에서의 대책 마련과 서울시의 진상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성희롱, 성추행 등 구체적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폭력 사건 등 연거푸 이어진 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성폭력 사건을 모두 ‘불미스러운 사건’이라 불렀다. 여성가족부도 피해자를 ‘피해 고소인’, ‘고소인’으로, 성폭력은 모두 ‘피해’로 칭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고 박 시장 빈소 조문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류호정·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발언을 사과하며 ‘피해 호소인’이라 말했다. 미래통합당, 정의당 등 야당은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 고소인 등을 섞어 사용하고 있다. 

서울시가 15일 취재진에 배부한 서울시 입장문. 성추행 등 피해는 '인권침해'와 '피해'로 일축하고 피해자 A씨는 '피해호소 직원'으로 명명했다. ⓒ김서현 기자
서울시가 15일 취재진에 배부한 서울시 입장문. 성추행 등 피해는 '인권침해'와 '피해'로 일축하고 피해자 A씨는 '피해호소 직원'으로 명명했다. ⓒ김서현 기자

법률적으로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은 없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단체는 A씨를 피해자로, 피해 내용을 성추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 박 시장 성추행 사건을 통해 전면에 등장한 말이다.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특별한 입장이 있어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현재 피해 호소 직원은 공식적으로 서울시에 피해 사실을 신고한 바 없다. 공식적으로 피해 사실이 접수되면 그때부터 ’피해자‘ 용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당정청이 한목소리로 피해 호소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 박 전 시장의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내포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과 여성가족부 등은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비서 성폭행 혐의를 폭로했던 김지은씨를 ‘피해자’라 불렀다. 1심에서 안 전 지사가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도 재판부와 당·정 모두 김씨를 피해자라고 불렀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과거 들어본 바 없는 표현”이라며 “사건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책임지고 싶지 않아 만들어낸 조어가 아닌지 의심된다”고 의견을 밝혔다.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대표 변호사는 “법률 용어가 전혀 아니며 법률상 관계에서는 고소인 등으로 불러야 한다”며 “성폭력 관련 법에서 피해자의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절차상에 피해자라는 용어가 규정돼있다.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 불러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라는 말은 그동안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단순히 법률적 위치를 지칭할 때만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3,4년 전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에서 논의했던 단어라며 현재 쓰임과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과거 있었던 논의와 쓰임은 오로지 피해자 보호를 위한 취지에서 촉발했던 것”이라며 “지금 쓰임은 피해자의 주장을 근거 없는 주장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쓰이는 듯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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