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건축가가 말하다]

나도 예순이 됐다.
우선, 그동안 신이 나의 삶에 허락해 주었던 수많은 행운에 먼저 진심으로 감사한다. 예순은 세월이 빚어낸 두꺼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과도 같다. 이미 지나온 페이지에는 웃음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고, 남은 장은 많지 않지만, 그 속에는 더 깊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예순의 나이는 마치 긴 여정을 걸어온 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자리와도 같다. 먼 길을 함께했던 이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기억 속 풍경마저도 흐릿해지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내 삶에 대한 또 다른 결이 되어 오늘의 나를 이야기해 준다.

어릴 적 내 꿈은 훌륭한 화가였다. 하지만 형제가 다섯이나 되는 평범한 집안이라서 돈이 많이 드는 미술대학 진학은 감히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부모님은 학비도 저렴하고 졸업 후 취직이 보장되는 국립대 사범대에 가는 조건으로 대학 진학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보기 좋게 실망을 안긴 채, 후기로 건축공학과에 진학했다. 공모전 준비나 설계과제 등으로 귀가가 늦는 일이 많아 밤길을 걱정하신 아버지가 학교에 데리러 오신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늦게까지 설계 작업을 해야만 하는 건축학과의 특성상, 귀가 시간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부모님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학교를 관둘까 생각한 적도 있다. 보수적인 사상이 강한 그 시대 부모님으로서는 남학생들만 우글거리는 공대, 그것도 모자라 학교 설계실에서 밤을 새우겠다고 하니, 기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며, 그렇듯 부모님께 염려와 걱정을 끼치는 딸이 됐고, 억울하다고 엄마에게 대들기라도 할 때면, 꼭 너 같은 딸 하나만 낳아서 키워보라는 야단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대학교 3학년 때 부산건축대전에서 우수상과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고, 4학년 졸업작품 품평회에서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후 아버지는 건축설계에 대한 나의 애정을 조금씩 이해하시기 시작했고, 덕분에 나도 내 재능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건축설계를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게 됐고, 공간을 짓는 동시에 내 삶을 지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부, 석사과정을 마치고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쌓으면서도 왠지 뭔가 늘 부족하고 마음속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다. 유치원에 관한 석사논문도 그러했고, 이왕이면 건축이라는 남성 중심의 물리적 환경에 있어(사회적 약자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다양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건축공간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고령자 관련 연구실로 유명한 오타키 교수님이 계신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하지만 진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 외상은 없었지만 순간 정신을 잃었고, 그저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으면서도 차 안에 놓여 있던 망가진 노트북 생각과 이런저런 번거로운 절차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차는 폐차했지만 폐차할 수도 없는 내 몸은 그 후로 수시로 아팠다. 2년이 넘도록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러던 중 또 교통사고가 났고 내 몸과 맘은 또 그렇게 부대끼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공부를 관둘 수도 없는 상황에서 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좋지 않은 몸으로 병원과 학교를 오가며 힘들게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점점 길어지는 유학 생활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어서 이불을 덮고 펑펑 운 적도 정말 많았다.
힘들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시 통계학 분야에서 유명하셨던 이시무라 교수님의 도움으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만들었던 데이터를 활용한 ‘자료분석’과 ‘통계처리방법’이 여러 권의 통계서적으로 출판됐다. 일부는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고, 중국어로 번역되기도 해, 그 인세만으로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교수님 두 분은 내 인생의 은인이 돼 주셨다.

졸업을 앞두고 한국으로 귀국할지, 일본에 체류할지에 대한 갈등으로 맘이 편치 않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너무 그리웠지만 이미 일본 생활에 익숙한 터라 일본에서 취업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회사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기다리는 시간을 수도 없이 보냈다. 하지만 여러 조건이 잘 맞지 않아 취업은 계속 미뤄졌다. 건축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이 한국보다 일본에 많다고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박사학위를 지녔더라도 건축이라는 보수적인 분야에서 외국인 여성이라는 점은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만은 않았다. 열 군데 넘는 회사에서 면접을 맡은 간부사원은 하나같이 남성이었다. 아니, 지금껏 내 인생에서 여성 면접관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건축학 분야도 아직은 남성 중심 사회였던 것이다.
취업의 관문에서 실망과 함께 조금씩 위축되는 자신을 느낄 때쯤, 규모 면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일본의 설계회사 ㈜일건설계(NIKKEN SEKKEI)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사원이 되는 기회를 얻었다. 첫째 운이 좋았고, 둘째는 건축에 대한 나의 열정과 의욕을 회사에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고령자복지에 관한 학위논문과 전문성, 통계 서적의 저술에 대한 인정과 연구 능력, 한국에서의 실무 경험 등 역량을 인정받아 의료복지시설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부서에 채용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교통사고 후유증과 함께 야근으로 지쳐가는 몸과 긴 일본 생활에 지친 맘은 나를 자꾸만 한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중 또 운 좋게 교수로 임용돼 지금까지 부경대에 재직하고 있으며, 이후 긴 일본 생활을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건축심의나 각종 위원회에 참석할 때면 으레 주위를 둘러보는 버릇이 있었다. 여성의 수가 너무 적어 언제나 부담스럽고 신경이 쓰이곤 했다. 그래서 될수록 말을 아끼고 나름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다. 긴 시간 동안 여성에게는 별로 유리하지 않은 건축 분야에서 묵묵히 전공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달려온 덕분에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 참여의 한 영역을 만들었지만, 어쩌면 지금에 와서는 여성의 희소성에 의해 내 능력 이상으로 대접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릴 때 엄마의 “넌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에 가까운 바람은 먼 길을 돌고 돌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됐다. 어릴 적 꿈인 화가가 됐고,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라는 희망과 함께, 기능과 구조, 그리고 아름다움을 만드는 미래의 작은 건축가들에게 희망을 가르치고 있다.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고마운 분들이 주변에 늘 계셨고, 항상 운이 따랐다. 또 매 순간 내 선택은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지구력만큼은 누구보다도 대견하다고 자평한다. 대학 입학 후 형제가 많아 부모님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드리고자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받았고, 주경야독하며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부모님의 원조나 도움 없이 유학 생활 내내 장학금을 받아 가면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지금껏 내 삶에 있어 난 항상 다른 사람보다 긍정적이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믿고 격려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어디를 여행하거나 할 때면 꼭 나를 위한 선물부터 사는 게 습관이 됐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내 어깨를 양팔로 감싼다. 토닥토닥!
박사과정 중에 만난 다양한 일본 고령자들의 얼굴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세월이 새긴 주름과 고요한 눈빛 속에는 인생의 무게와 동시에 작은 기쁨이 있었다. 느린 걸음을 옮기며 건네던 미소, 짧은 대화 속의 온기. 나는 그 안에서 ‘행복이란 결국 존엄을 지켜주는 공간 속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배웠다. 나도 이제 행복한 노후를 꿈꾸며, 그동안 결코 쉽지 않았던 여성 건축인로서의 길에서 때로는 흔들리고 넘어지면서 얻은 감수성은 건축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여성건축가들과 함께 나눈 연대의 마음은 또 다른 행복의 원천이었다.
이제 예순이 된 나는, 성취보다 더 중요한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은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작은 대화, 오래된 풍경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간, 그리고 건축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순간들이다.
삶은 여전히 미완의 건축물과 같다. 완전하지 않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고, 불완전하기에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간다. 나는 그 불완전한 결 속에서 매일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 삶도 누군가에게 소박한 위로와 잔잔한 행복의 흔적으로 남기를 바란다.
※ 본 에세이는 2010년 세상을 바꾸는 여성 엔지니어5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책에 수록된 글을 일부 수정하고 게재한 내용을 요약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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