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문득 요 근래 내가 나눈 그나마 사교적인 대화라고는 저 한마디가 전부였음을 깨달았다. 요즘 대세인 1인가구인 데다가 프리랜서인지라 부대낄 가족도 직장동료도 곁에 없으니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특히 이렇게 가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외롭다는 소리가 기침처럼 새어나온다. 날 아껴주는 사람도 있고 친한 친구도 있고 일터에서 수많은 사람과 스쳐지나가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고독했다.
외로움, 멋 아니라 독!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외로움’은 낯설지 않은 주제다. 작년 한국리서치에서 발표한 ‘외로움 실태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7명은 최근 한 달 동안 외로움을 느낀 적 있다고 응답했으며, 약 20% 가량은 일상적으로 외로움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그깟 외로움! 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외로움과 사회적 단절이 심장 질환, 뇌졸중, 우울증 등 신체적 질병을 유발해 사망 위험을 높인다고 경고하며 ‘외로움’을 세계 보건 위협으로 규정했다. 이에 영국은 2018년 외로움 부서 장관을 임명했고 일본도 2021년부터 고독·고립 대책 담당실을 설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말하지 못하는 남자들
외로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공동의 노력이 유난히 반가운 까닭은 나도 스스로의 외로움을 인정하지 못했던 시절이 꽤 길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조량이 떨어지는 계절이면 쉽게 우울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필요할 때는 병원에 들러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됐지만, 처음 병원 문턱을 넘기까지는 꽤나 많은 자기검열과 편견이 있었다. 그 기원은 아마 학창시절, 아니 어쩌면 더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갈지 모른다. ‘남자는 태어나서 3번만 운다’는 고리타분한 얘기는 학교를 떠돌았고, 어떤 이유에서건 슬픈 감정을 드러내면 곧장 ‘나약하다’며 비난받았다.
살갑고 다정한 말을 낯간지럽다고 하는 문화 앞에서 풍부하고 섬세했던 감정은 점차 무뎌졌고 자꾸만 무뚝뚝해졌다. 어느 날엔가는 슬픈 이별 이후 친구들 앞에서 온갖 쿨한 척 다해놓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숨죽여 울었다. 우리사회 왜곡된 가부장적 남성성이 자꾸만 남자들을 외롭게 하고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고독사의 약 80%가 중장년 남성이며, 한 해 약 1만 5천여 명의 자살 사망자 중, 남성이 1만여 명에 달한다. “남자 새끼가 무슨!”이라는 말 앞에 많은 남성들이 “남자들끼리 무슨…”이라는 말로 체념하고 우울은 켜켜이 쌓여 남성들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감정인 ‘분노’로 변해 스스로를, 또 주변을 괴롭게 한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질문으로 모인 사람들
돈을 더 번다고, 여성 애인을 사귀고 가정을 꾸린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남성성이 외로움에 미쳐온 영향을 살펴보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우물을 팠다. 올해 초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책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남함페에 동명의 모임을 열었다. ‘제목에 꽂혀서’,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모인 사람들과 조심스레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어떤 참여자는 핸드폰에 천 명이 넘는 사람의 연락처가 이 있지만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서 외롭다 했고, 어떤 이는 반대로 친밀한 사람은 있지만 가볍게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 말하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외로움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영장류의 사회집단 크기와 뇌 크기의 상관관계를 통해 인간에게도 최대 150여 명의 인맥 최대치가 존재하며, 그 안에는 ‘좋은 감정을 가진 50여 명’, 더 가까운 ‘공감 그룹’ 약 15명, 완전히 가까운 ‘지지그룹’ 약 5명, 이렇게 구성된다는 ‘던바의 수’에 착안해 나름대로의 관계망을 그려봤다. 좀 더 현실적이고 한국적으로 핸드폰에 몇 명의 연락처가 있는지, 최근 메시지나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은 몇 명 정도나 되는지, 직접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은 사람은 몇 명인지 확인하는 활동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연락 목록은 온통 ‘일’뿐, 이대로는 외롭기 그지없는 미래가 곧 오겠구나 싶어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이어서 책에 나오는 ‘친족 지킴이(Kin Keeper)’ 역할을 이야기 했다. 이는 가족 간 유대감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고 약속을 잡고 선물을 준비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감정, 관계 노동은 주로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거나 행해졌다. 생각해보면 나부터도 여성 친구들의 관계를 부러워 하면서도 막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안부를 묻는다던가 통화를 하는 등의 노력에는 소홀했다. 약간의 반성과 함께 변명 거리도 찾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2024년 우리나라 국민들의 하루 평균 여가 시간은 평일 3.7시간, 휴일 5.7시간으로 가장 많이 참여한 여가활동은 TV시청(62.8%), 온라인/모바일 동영상 시청(48%)로 잡담/통화(30.6%)는 4위, 친구만남은 18.9% 수준이었다. 사실 굳이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체감하고 있다. 내 여가시간은 너무 작고 소중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는 커녕 유지하기에도 모자란다.
모임이 끝나고 훈훈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방은 어둡고 많은 관계가 아슬아슬하며 하루는 어김없이 바쁘다. 그렇다고 근 시일 내에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속 시원한 해결책이 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르다. 이 비극이 어쩌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엉킨 실타래를 같이 풀어보자고 말할 용기가 생겼달까? 쓸쓸한 계절이 찾아온다. 모처럼만에 친구에게 훌쩍 전화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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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