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기자 추천
추석 연휴 페미니즘 콘텐츠

최장 열흘의 황금연휴다. 가족이나 친구와 둘러앉아 OTT를 켜면 어김없이 나온다. “뭐 볼까?” 페미니즘 콘텐츠를 함께 보자고 권하고 싶지만, 돌아올 대답이 걱정된다. “재미없지 않을까?” “너무 진지한 거 아냐?” 그럴 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를 모았다.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은근하게 스며드는 ‘페미니즘 한 방울’이 담긴 작품들이다. 여성신문 기자들이 직접 골라 추천한다. 이번 연휴, 색다른 재미로 추석을 풍성하게 즐겨보는 건 어떨까.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 / 조지 밀러 감독 / 샤를리즈 테론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일이 거의 없다. 쉽게 질리고 집중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매드맥스>를 다섯 번 넘게 볼 수 있었던 건 볼 때마다 새롭고 몰입할 수밖에 없는 매력 덕이다.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미래, 독재자 임모탄에 의해 왼팔을 잃은 퓨리오사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 대신 기름으로 얼굴을 가린다.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자리를 거부한 그는 노예 신분으로 사령관의 자리까지 오른다. 출산기계이자 독재자의 소유물로 살아온 다섯 여성과 함께 구원을 좇아 8기통 전투 트럭을 모는 퓨리오사에게 ‘구원’은 ‘어머니의 녹색 땅’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부장’ 임모탄과 반대에 선다.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을 질주하며 펄쳐지는 액션에서 아드레날린은 폭발하고, 억압에 균열을 내는 여성들의 연대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여기선 누구나 다 아파.” 퓨리오사의 이 말은, 망가진 세상에서 상처 없는 이는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좌절 대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전해준다. 웨이브, U+모바일TV, 쿠팡플레이에서 감상 가능.
이하나 기자 추천
큰엄마의 미친봉고
2021/ 백승환 감독/ 이영희

명절마다 온 가족이 모이지만 며느리들만 분주히 일하는 풍경.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감독 백승환)가 예리하게 짚은 지점이다.
SNS에 올라온 단 세 줄의 글을 바탕으로 각색한 명절 코미디다. 가부장적인 유씨 가족의 맏며느리로 40여 년간 묵묵히 제사상을 차려 왔지만,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영희(정영주)가 중심인물이다. 영희는 뒤집개 대신 봉고차 열쇠를 집어 들고 집안 며느리들을 모두 태워 떠난다. 예상치 못한 큰엄마의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여자들과, 그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자들의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며느리’가 아닌 ‘영희’, ‘은서’, ‘명지’ 같은 여성들의 이름도 호명하는 영화다. 일하는 여자들 옆에서 손도 까딱 않던 남자들의 변화라는 해피엔딩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누구나 공감하며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웨이브, 왓챠, U+모바일TV에서 감상 가능.
이세아 기자 추천
안토니아스 라인
1997/마를렌 고리스 감독/빌레케 반아메루이

2025년 한국에서도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네덜란드는 이미 30년 전에 영화로 그려냈다. 바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주인공 안토니아는 딸 다니엘과 함께 엄마의 임종을 지키러 왔다 농장을 물려받으며 마을 정착하게 된다. 그렇게 4대에 걸친 모계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결혼은 필수도, 의무도 아니다. 안토니아에게 한 광부(曠夫)가 청혼한다. “내 아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해” 안토니아는 말한다. “난 당신의 아들이 필요 없는데” “그럼 남편은 필요하지 않아?” “뭐 때문에요.” 딸 다니엘 역시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갖길 원한다. 안토니아는 그 선택을 존중해 도시로 나가 멋진 상대를 물색해주고, 다니엘은 원하는 대로 아이를 갖는다. 그렇게 탄생한 테레사까지 이어지며, 영화는 결혼 없이도 얼마든지 평등하고 재미있는 가족을 꾸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결코 무겁지 않다. 누군가를 배척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대사처럼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춤추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상하게 위로받는 기분이다. 가부장제의 ‘가족’을 넘어 새로운 정의를 하는 경험이랄까. 웨이브, 왓챠에서 감상 가능.
신다인 기자 추천
그녀가 말했다
2022년/마리아 슈라더 감독/캐리 멀리건·조 카잔

2017년 폭로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는 전 세계를 뒤흔든 ‘미투(#MeToo)’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리고 와인스틴의 성범죄를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을 알린 두 여기자가 있다. 바로 뉴욕타임스(NYT)의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다. 두 기자는 피해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피해자들은 좀처럼 와인스틴의 범죄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취재하는 두 기자들도 협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두 기자는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 나간다. 두려움에 떨던 피해자들도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한다.
미투 운동이 시작된 지 10여 년이 흘렀지만 권력형 성범죄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도 여전하다. 영화는 침묵을 깬 피해자들과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저널리즘의 힘을 보여주며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실제 와인스틴의 범죄를 폭로하고, NYT 취재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배우 애슐리 저드가 영화에 출연했으며, 귀네스 팰트로도 목소리로 영화에 참여했다. 쿠팡플레이, 웨이브, 애플티비에서 시청가능.
김세원 기자 추천
에버 애프터
1998년/앤디 테넌트 감독/드류 배리모어

신데렐라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배경은 16세기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 아버지를 잃고 계모와 새언니들 밑에서 자란 다니엘은 당찬 18살 소녀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으며 성장한 그는 왕자 앞에서도 당당히 사회 정의를 외치며,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동화 속 전형적인 ‘백마 탄 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다니엘을 구하기 위해 왕자가 뒤늦게 달려오지만, 이미 다니엘이 악당을 물리친 뒤였다. 영화의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모든 새언니가 주인공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새언니 중 한 명은 다니엘의 조력자로 등장하며 해묵은 ‘여적여’ 구도에 균열을 낸다.
옛 동화 속 여주인공을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재해석한 작품은 이제 흔해졌지만, ‘에버 애프터’가 무려 30여 년 전에 나온 작품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페미니스트라면 반드시 봐야 할 필수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웨이브, 디즈니플러스에서 시청 가능.
김세원 기자 추천
핫스팟: 우주인 출몰 주의!
2025 / 미즈노 이타루 감독 / 이치카와 미카코

제목만 보면 B급 코미디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뜻밖의 여성 서사가 숨어 있다. 주인공 엔도 키요미는 지방 소도시 호텔에서 일하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흔히 드라마 속 엄마들이 ‘보살’처럼 그려지거나 ‘희생’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키요미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그냥 먹고살아야 하고, 억울하면 따져야 하고, 필요하면 우주인 친구까지 불러다 쓴다.
드라마는 우주인의 능력을 빌려 도시 재개발 음모나 호텔 매각 같은 큰 사건을 풀어나가지만, 사실 진짜 볼거리는 키요미가 흔한 ‘모성의 상징’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견디고 웃어넘기는 보통 여성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우주인이 출몰해도 엄마는 출근해야 하고, 호텔은 돌아가야 한다는, 아주 현실적인 판타지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여성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넷플릭스에서 감상 가능.
손상민 기자 추천
여인과 바다
2024/요아킴 뢰닝 감독/데이지 리들리

여자라서 수영도 못하던 시절, 남성 기록을 깨고 여성 최초로 34km에 달하는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넌 이가 있었다. 1905년 뉴욕시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트루디 에덜리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각고의 노력 끝에 수영을 시작한다. 극심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언니와 코치 등 여성들의 연대는 물론이고 남성 동료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트루디 에덜리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시청 가능.
신미정 기자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