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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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가라앉은 뒤

9·11 테러, 인도양 지진해일, 런던 7·7 테러, 그렌펠타워 화재, 코로나19 대유행.... 20여 년간 온갖 재난 현장을 누빈 영국의 재난 복구 전문가 루시 이스트호프의 에세이다. 재난 복구란 잔해를 치우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만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반지 하나, 사진 한 장까지 가족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워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점검하고 바꾸는 것까지가 진짜 ‘복구’라고 저자는 말한다. 세월호와 이태원 등 수많은 참사를 겪은 한국 사회는 과연 제대로 ‘복구’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나 되짚게 한다.

루시 이스트호프/창비/2만2000원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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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정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집단학살, 인종차별, 난민 배척, 강화되는 국경... 카메룬 출신 정치철학자 아쉴 음벰베는 현대 정치의 진짜 모습이 ‘죽음정치’라고 본다. 적을 만들어 죽여도 되는 존재로 규정하고 실제로 죽음에 내모는 정치를 말한다. 과거 식민지 지배자들이 원주민을 ‘언제든 죽여도 되는 존재’로 여겼듯, 지금도 권력자들이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를 마음대로 정한다는 얘기다. 극우 포퓰리즘이 활개 치는 시대에 섬뜩한 통찰을 제공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죽음세계의 확산에 맞서 새로운 세계 윤리를 제시한다”고 평했다. 2024년 인문학 분야 최고 상인 홀베르그상 수상작.

아쉴 음벰베/김은주·강서진 옮김/동녘/2만5000원

ⓒ틈새의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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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

서강대교 남단에서 군용차를 맨몸으로 막아선 대학생, ‘윤석열퇴진을위해행동하는청년들(윤퇴청)’ 실무를 이끈 조직가, SNS로 수백만 명에게 집회를 알린 K팝 팬, 동덕여대 출신 대학원생노조 수석부지부장.... 2024년 12월 3일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광장에 나선 젊은 여성들은 체계적으로 집회를 조직하고 행동에 나선 정치 주체들이었다. 광장 이후에도 박물관에 물건을 기증하고, 시민 대표로 활동하며, 노조를 만드는 등 일상에서도 정치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슬기 기자가 광장에서 집결·안전·메시지 관리를 담당했던 여성 10명을 만나 그 이름과 구체적인 역할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슬기/틈새의시간/2만원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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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서양미술 거장’ 루벤스의 명작들은 사실 조수와 제자들이 그렸다. 인상주의 미학을 정립한 핵심 인물인 베르트 모리조는 오랫동안 ‘마네의 제수씨’ 정도로만 알려졌다. 명작 ‘비너스의 탄생’은 보티첼리의 스타일이 ‘아마추어적’이라는 이유로 400년간 미술사의 뒷전 취급을 받았다. 미술사학자 박재연 아주대 교수는 미술사가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였고, 권력과 돈이 작품의 가치를 좌우했다는 데 주목했다.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며, 거장과 명작 뒤에 가려진 사회적 조건과 제도의 힘에 주목해 미술사를 해설한다.

박재연/한겨레출판/2만원

ⓒTHE CIRCL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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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 새롭게 번역돼 출간됐다. 1940년대 전쟁 직후 태어난 한 여성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함께 보여준다. 정치적 사건들, 여성 권리의 변화, 유행했던 노래와 광고까지 개인의 삶과 사회 변화를 겹쳐 그렸다. 보통 자서전과 달리 ‘나’를 앞세우지 않고 ‘그녀’, ‘우리’, ‘사람들’로 서술했다. 개인의 역사에 공동의 기억을 투영해 글을 쓰는 ‘비개인적인 자서전’이라는 새로운 형식이다. 그렇게 한 여성의 기억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한 세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경험의 증언이 된다.

아니 에르노/신유진 옮김/THE CIRCLE PRESS/1만9000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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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나라는 통증

논픽션 작가 하재영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 섭식장애, 알코올 의존,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 등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리베카 솔닛, 캐럴라인 냅, 비비언 고닉, 주디스 허먼 등 다른 작가들이 각자의 고통을 어떻게 글로 썼는지 공부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저자에게 통증은 “단순한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존재가 세계와 마찰하는 순간에 생겨나는 미세한 감각”이며, “내가 지극히 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개인적 고통이 어떻게 여성들의 공통 경험과 연결되는지, 나아가 목소리 없는 존재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치열한 자기 탐구다.

하재영/문학동네/1만7000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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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1990년대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해 평생 책을 만드는 여성 ‘석주’의 이야기다. 편집 일의 매력은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오히려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석주는 같은 편집자인 조원호와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틱하지 않고 매일 산책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연애를 한다. 석주에게 일과 사랑은 “얼마간 예상을 비껴나 있으나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것이자,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딸에 대하여』 『너라는 생활』 김혜진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로, 작가의 실제 출판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일’이 지닌 풍부한 의미와 결을 들려준다.

김혜진/문학동네/1만6800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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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

햇빛이 “양양양양” 빛나고, 푸른 닭은 해를 “콕콕콕콕” 쪄 먹고, 달빛은 달을 “톡톡톡톡 쓰다듬”는 세계. 김선우 시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일곱 번째 시집에 ‘축 생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공 차는 소년들, 빈 배에 서린 고요함, 강가를 걷는 새 한 마리까지 일상에서 만난 작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시가 됐다. 도시의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작은 생명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고, “예순에 처음 쓰러진” 엄마와의 작별을 앞두고 슬퍼하기보다 죽음도 새로운 시작이라고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를 배우고 싶다.

김선우/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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