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를 보며 스무 살에 알게 된 한 선배가 떠올랐다. 단과대학 MT에서 만난 타과 선배는 학과 수석에 과대표였으며, 매사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 그런 모습에 호감이 가게 되어, 먼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연락처를 교환한 뒤 대화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자연스레 썸 단계로 발전했으나 그 이후부터 여유롭던 선배의 태도는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길을 걸을 때도 주변 상황만 신경 쓰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라도 나눌 때면 맥락은 잊은 채로 “헐”, “아, 진짜?”, “그랬구나” 만 반복했다. 결국 서서히 연락을 끊으며 멀어졌는데, 연락이 끊기고 이주일 정도가 지난 뒤 선배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선배는 첫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미안, 나 사실 모태솔로야.”
순수한 혹은 미숙한 모태솔로의 모습
선배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를 보고 나니 그가 이전과 왜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에게 내 존재는 일정 수준의 점수를 받아내야만 하는 시험과도 같았다. 선배는 인터넷에서 본 대로, 친구들이 이야기한 대로, 나를 안쪽에서 걷게 하고 다른 남자가 쳐다보진 않을까 항시 주변을 살핀 것이다. 여자의 말엔 무조건적인 공감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헐! 진짜? 그렇구나”만 반복한 것이었다.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더 의아해진 부분도 있었다. 나 역시 스무살의 첫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와 나는 이렇게 다른 걸까 싶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은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를 보면서도 자주 떠오른 생각이었다. 적극적이고 저돌적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여성 출연자들과 다르게 남성 출연자들은 종종 ‘왜 저럴까’ 싶은 행동들을 보이곤 했다. 일례로 재윤이 그렇다. 그는 좋아하는 여명이 다른 남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전하고자 “내 호감은 5인데, 100만큼 과장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명은 “그냥 별 생각이 없었는데 ‘뭔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개인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후 여명과 재윤의 만남은 끝이 났지만, 재윤은 여명이 다른 여성 출연자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또 다른 방식으로 여명에게 상처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를 여성 출연자들에게 상담받으며 해결을 구한다. 결국 재윤은 여성 출연자의 도움으로 여명에게 쓸 장문의 편지를 준비하며 건네는데, 프로그램에 비친 재윤의 모습은 마냥 수동적이면서도 소극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재윤의 이런 모습이 비단 ‘여성 출연자’에게, 그중에서도 자신이 호감 있는 이에게만 드러난다는 점이다. 정작 남성 출연자와 있을 때는 조언을 던져주기도 하는데,정목이 관심 있는 이성에게 보낼 편지 내용을 고민하자 “직구로 좀 자신감 있게. 이름도 딱 쓰고.”라고 조언한다. 유독 남성 출연자 앞에서 말이 많은 재윤의 모습에 카더가든은 “노재윤 씨 말이 왜 이렇게 많아요.”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으니, 이 모습만 보더라도 재윤의 태도가 상대에 따라 명확하게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신이 이성과 관계 맺지 못하는 진짜 이유
비단 재윤만이 이런 문제를 지니는 건 아니다. 여성 출연자들과 다르게 대다수의 남성 출연자들은 ‘호감 있는 이성’ 앞에서 유독 표현력이 줄어들고 주변을 의식한다. 다른 남성 출연자와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의 불안을 속절없이 쏟아내는 등의 행동을 드러내곤 하는데, 왜 유독 남성 출연자에게만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 기저에 자리한 기이한 규범을 마주할 수 있다.
왜 이런 어긋남이 생길까? 우리는 오랫동안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함께 지낼 사람’이 아니라 ‘연애 후보’로 보기 쉽다. 그러면 대화는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내 매력을 증명하고 호감을 따내야 하는 시험장이 된다. ‘썸녀 리드하는 법’ 같은 온라인에서 쉽게 접하는 연애 공략은 이런 생각을 더 굳힌다. 하지만 현실의 관계는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틀에 갇히면 대화는 긴장과 자기검열로 가득하고, 결국 관계는 실패로 끝나기 일쑤다. 그러면 자책, 회피, 상대방 탓으로 의식이 흐르기 쉽다. 이건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도 ‘잘 웃기’, ‘반응 잘 하기’ 등과 같은 수행 압박을 받는다.
해결의 시작은 첫 단추를 바꾸는 데 있다. ‘상대를 연애 대상’으로 전제하는 순간, 모든 교류는 시험이 된다. 반대로 ‘한 사람’으로 바라보면 대화의 목적이 달라진다. 다시 처음의 선배로 돌아가 보자. 선배가 나를 안쪽에서 걷게 한 건 배려이자 수행이었다. 배려가 수행으로 변질되는 지점에는 ‘정답 있는 연애’라는 학습이 있다. 우리는 그 정답지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모솔이라서”가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처음이고, 누구나 서툴 수 있다. 중요한 건 대본을 던지고, 상대방을 그 사람 자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이 시간을 소중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것. 상대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기억한 뒤 이야기해주는 것. 이 몇 가지만으로도 당신의 관계성은 더욱 넓게 뻗어나갈 것이며, 언젠가 서로를 웃게 할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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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