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2024년 12월 3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초유의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그리고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파면을 선고했다. 딱 123일.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광장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성평등 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여성의 삶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고, 젠더 혐오를 통치 전략으로 삼은 정치를 멈추라는 목소리였다. 결국 안티 페미니즘 정부는 파면됐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묻는다. 탄핵 이후, 우리는 어떤 사회를 다시 만들어가야 할까.
혐오로 쌓은 권력은 결국 무너진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성평등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대표적으로 내세운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은 단순한 부처 통폐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국가가 성차별과 젠더폭력에 대한 정책적 대응을 축소하겠다는 신호였고, 이후 각 지자체에서 여성정책 부서가 통폐합되거나 명칭이 변경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정책 기반이 약화되는 동안, 혐오 표현과 반페미니즘 정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확산됐다.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는 “여성차별은 망상에 가깝다”며 성차별을 부정했고, 여성가족부 내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검토하던 직원들은 대통령실의 감찰을 받았다. 성평등 정책을 논의하는 것조차 ‘정권에 반하는 행동’으로 낙인찍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여성의 목소리를 위협하는 극우 단체들의 활발한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신남성연대는 동덕여대 학생들의 본관 점거 시위를 방해하며 학교 정문 앞에서 연일 맞불 집회를 열었고, 이화여대 탄핵 촉구 집회 현장에선 팻말을 부수고 학생의 멱살을 잡는 폭력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에 대해 정부나 학교 당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결국 정치가 여성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최근 국민의힘 소속 장제원 전 의원은 성폭행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예정이다. 9년 만에 겨우 나온 피해자의 이야기는 공론장에 나오기 전에 사라졌고, 책임을 묻는 절차도 종료됐다.
윤석열 정부는 여성을 사회적 갈등의 대상으로 만들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전략을 반복해왔다. 이로 인해 여성혐오와 배제가 정당화되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들의 일상과 안전에 축적된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바라는 다음 사회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은 단지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며, 이 다음 사회는 분명 지금보다 평등해야 한다. 페미니스트가 바라는 다음 한국 사회는 차별이 아닌 동등함을 기본값으로 여기는 사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대표성의 불균형부터 짚어야 한다. 현재,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20%로, OECD 평균인 34.1%에 한참 못 미친다. 광역자치단체장은 지방선거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여성도 당선된 적이 없다. 933만명이 사는 서울시에서도, 1369만명이 사는 경기도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자치단체장은 그간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여성의 정치 참여가 여전히 '예외' 취급받는 상황에서, 여성의 삶과 관점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리 없다.

정치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는 아직도 성별에 따라 역할을 구분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문화가 깊숙이 박혀 있다. 가사와 육아는 여전히 여성의 몫이고, 성폭력 예방은 피해자가 '조심'해야 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외모에 대한 강박은 여성의 자율성을 억누르고, 연애와 섹슈얼리티에서도 여전히 남성이 '주도권'을 쥐는 방식이 반복된다. 우리는 이런 문화 속에서 살아가며, "이래도 괜찮은 건가?"라는 질문도 차마 꺼내지 못한 채 성차별적 인식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하지만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정치가 바뀌면 제도가 바뀌고, 제도가 바뀌면 문화도 바뀔 수 있다. 성평등은 단지 여성만을 위한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해 가는 방식이며, 각자의 존재가 존중받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방향이다. 광장 이후의 한국 사회는 그래야 한다. 여성이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남성도 돌봄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사회, 혐오 대신 연대를 배우는 사회. 그 길의 이름이 페미니즘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이름으로 다음을 상상해야 한다.

숫자 너머의 약속
123일 동안 시민들은 광장으로 나왔다. 연인원 1,000만 명, 발언 1,000개, 시민행진 145km, 220여 개의 공연. 비가 오고 눈이 와도, 123일 중 67일은 광장에서 ‘윤석열 파면’과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그 시간 속에서 시민들은 단지 정권 교체를 외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상상했다. 비폭력과 평등, 다양성과 혐오 배제의 원칙 속에서 정치가 우리 삶을 어떻게 회복시켜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윤석열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사회대개혁을 위한 11개 분야에서 118개의 과제와 424개의 세부과제, 그리고 1개의 특별과제를 발표했다. 그 중에도 성평등은 결코 빠질 수 없는 핵심 과제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정치와 사회가 여성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다시 묻는다. 이 사회는 과연 누구를 중심으로 설계되고 있는가? 그리고 다음 사회는 누구의 권리를 중심에 둘 것인가? 123일의 외침은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는 혐오를 딛고 돌봄과 평등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향해 다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성평등을 향한 열망 또한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 “응원봉 광장의 주역은 여성… 정치권, 성평등 사회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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