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 성폭력, 그 이후의 삶]
미성년 때 시설 입소한 피해자
‘열여덟 어른’ 되면 홀로서기
겨우 500만원으로 자립해야
디딤돌 씨앗통장 등 지원 제외

성폭력은 사건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성폭력 신고 이후의 지난한 과정은 성폭력의 다른 얼굴이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지지기반이어야 할 가정에서 가해가 발생하기에 피해자는 더 큰 고통과 배신감, 상실감을 느낀다. 가해자를 이해하고 싶고, 나만 참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집’을 잃는 일은 무섭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족 성폭력은 피해자가 어리고, 수년간 가해가 지속된다는 특징을 갖기에 더더욱 폭로가 어렵다.

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가정에서 벗어난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있다. 탈가정을 한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성신문은 친족 성폭력 사건 이후의 삶에 주목한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시설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시설을 퇴소 후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따라간다. [편집자 주]

경남에 위치한 친족성폭력 보호시설은 만19세 입소자의 독립을 준비할 수 있게 혼자서 지낼 수 있는 생활관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만19세 입소자가 없어 비어 있는 생활관의 모습 ⓒ신다인 기자
경남에 위치한 친족성폭력 보호시설은 만19세 입소자의 독립을 준비할 수 있게 혼자서 지낼 수 있는 생활관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만19세 입소자가 없어 비어 있는 생활관의 모습 ⓒ신다인 기자

다온(가명)씨는 중학교 2학년 때 경남에 위치한 친족성폭력 보호시설(이하 경남시설)에 들어가 5년간 생활했다. 만 19살이 되자 그는 시설을 나와야 했다. 홀로서기를 위해 자립수당을 신청하려고 시설에 서류를 요청했지만, “자립지원금 대상 시설이 아니라서 신청할 수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정부는 ‘자립준비청년’에게 보호종료 후 5년 동안 매월 50만원의 수당이 지급하고 있다. 별도로 1천만원~2천만원의 자립정착금을 지원하는 지자체도 있다. 하지만 친족성폭력 보호시설 퇴소자는 자립수당을 받지 못한다. 

자립수당은 아동복지시설·가정위탁·청소년 쉼터 퇴소 청소년 등만 받을 수 있다. 지난 2월 아동복지법이 개정되며 대상이 확대됐지만, 친족성폭력 보호시설 아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동학대 보호시설은 보건복지부 소관이고 친족성폭력 보호시설은 여성가족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디딤씨앗통장’으로 불리는 ‘자산형성지원사업’의 대상에서도 친족성폭력 보호시설 입소아동은 빠져있다. 자산형성지원사업 대상은 ‘아동복지법 시행규칙’에서 정하고 있는데 ‘특별지원 보호시설’ 입소 아동은 해당되지 않는다. 

원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친족성폭력 피해자에게 자립수당은 필수다. 김옥분 경북시설 원장은 “성인이 되더라도 심리 상담이 계속 필요한 아이들이 있는데, 퇴소하면 심리 상담은커녕 집을 얻고 생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지은진 경남시설 원장도 “디딤씨앗통장이라도 받아서 퇴소할 때 천만원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자립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나”고 했다.    

경남시설 생활관 화장실에 가지란히 걸려 있는 칫솔들. ⓒ신다인 기자
경남시설 생활관 화장실에 가지란히 걸려 있는 칫솔들. ⓒ신다인 기자

“퇴소 후에도 자립 연계 시설 필요해”

보호시설 퇴소 후 지원되는 자립지원 제도 역시 미흡하다. 친족성폭력 보호시설에서 퇴소하는 아이들은 만19살에 고작 500만원의 퇴소자립지원금을 받고 사회로 내보내 진다.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살이 되면 시설에서 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온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경남시설은 자립지원공동생활시설과 주거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어 몇 년은 집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어서다. 그는 “다른 시설에 살던 저희 언니는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돈 한 푼 없이 나와야 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때 학업과 학원을 병행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딴 그는 졸업 후 자립지원공동시설에서 머물다 주거지원사업을 통해 원룸을 얻었다. 원룸에서 2년간 살며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받은 월급 200만원 중 70%를 모았다. 경남의 자립지원공동시설은 월급의 30~40% 이상 저축해야 입주할 수 있다는 원칙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온씨처럼 자립지원공동시설로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 4개의 친족성폭력 피해자보호시설 중 2곳에서만 자립지원공동시설을 운영한다. 

조금 더 풍족해진 집 밥. ⓒ다온(가명)씨 제공
조금 더 풍족해진 집 밥. ⓒ다온(가명)씨 제공

다온씨는 “처음에는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 라면만 끓여먹다가 시설 선생님이 식비 지원 사업을 알려줘서, 요리를 시작하게 됐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을 자주 해 먹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주거지원사업은 입주보증금 및 관리비를 면제해서, 여성폭력 피해자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단, 월세 및 각종공과금은 입주자가 부담해야 한다. 임대 기간은 2년이다.

원룸 임대기간이 끝날 때쯤 다온씨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다른 지역에 있는 간호대에 진학했다. 더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생활은 빠듯하다. 기초생활수급자라 약 생계급여 60만원으로 월세를 내고 생활도 해야 한다. 문제는 월 급여가713,102원원을 넘어가면 기초생활수급 자격이 박탈돼 아르바이트도 못한다.

“교내 근로를 하면 소득으로 잡히지 않지만, 올해 교내 근로는 떨어져서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어요”라고 다온씨는 말했다. “가끔 유기견 봉사도 가고, 몇 명 안 되지만 여기서 친구도 사귀었어요. 종종 혼자 영화 보러 가기도 해요.”

제도의 공백은 종사자의 노력으로 겨우 메꿔져

자립지원공동시설은 친족성폭력 보호시설 종사자들이 개원했다. 지 원장은 “10년 전쯤, 아이들이 퇴소하기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18살 때 퇴소지원금만 받고 끝이더라. 그래서 자립지원공동시설 만들고, 이후 주거지원사업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도의 공백을 종사자들의 개인기로 메우고 있는 상황이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8살 아이들에게 자립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좋아 ‘자립’이지 버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친족 성폭력이나 아동학대나 시설에서 퇴소하는 것은 동일한 조건”이라며 “자립지원관련 정책은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친족성폭력 보호시설 퇴소 아동도 자립지원정책에 포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달 서울시가 발표한 자립준비청년 자립지원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자립정착금을 2천만 원으로, 자립수당도 월 50만원으로 각각 상향했다. 더불어 자립준비청년에게 월세와 기숙사비 등 ‘주거비’를 월 최대 20만원까지 신규 지원한다.

류정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도 “친족성폭력 보호시설 아이들은 자립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다”며 “여가부, 복지부 따로 지원할 일이 아니다. 포괄적인 자립준비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이를 위해서는 아동복지법 혹은 성폭력방지법 등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조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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