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낙태죄·누리과정...‘혜실 게이트’에 묻힌 여성 현안들
성폭력·낙태죄·누리과정...‘혜실 게이트’에 묻힌 여성 현안들
  • 이세아 기자·이하나 기자
  • 승인 2016.11.29 21:21
  • 수정 2016-12-02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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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운동으로 확산된 성폭력 고발부터

낙태죄 폐지, 누리과정, 장애여성 성폭력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묻힌 여성 현안 짚어

 

한국 사회가 한 달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혜실게이트)’ 블랙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전례없는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분노와 비판은 원색적인 여성혐오로도 나타났다. ‘OO년’ ‘프라다 신발’ ‘강남 아줌마’ ‘성형 중독녀’ 등 사안의 중요성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정유라씨의 여성성을 강조해 희화화하는 언어가 미디어를 채웠다. 이 가운데 여성 현안들은 ‘해일 속의 조개’ 취급을 받으면서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여성신문은 게이트로 인해 이대로 묻혀선 안 되는 여성 현안과 이슈들을 되짚어봤다. 

①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고발

지난 10월 해시태그 ‘#오타쿠_내_성폭력’으로 시작된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문단, 디자인, 미술, 영화계 등 분야는 제각각이었으나 폭력의 양상은 대체로 단일했다. 대다수가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폭력을 경험했다. 가해자는 문예지에 작품을 게재할 권한을 지닌 편집위원, 명성과 인맥을 쌓은 작가, 유명 큐레이터, 평론가, 교수 등이었다. 피해자들은 문화예술계에서 고립·퇴출당하거나 경력과 평판이 무너질까 두려워, 사건 발생 이후에도 가해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피해 사실을 고발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예술가, 특히 남성의 ‘성적 자유로움’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남성들의 성범죄를 묵인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풍토를 형성했다.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은 성폭력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가해자의 법적 처벌과 피해 사실의 지속적 고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문단 내 성폭력 방지를 위한 작가 모임 ‘페미라이터’는 지난 15일 제안한 ‘문학출판계 성폭력·위계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작가 서약’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소설가, 시인, 문학 평론가 등 문학·출판계 종사자와 지망생 600여 명이 이 서약에 동참했다. 페미라이터가 제안한 모 시인의 강제추행 사건 기소 요청 탄원서에는 2000여 명이 서명해, 문단 내 성폭력 사건 관련 첫 기소가 이뤄질지 주목을 받고 있다. 주요 문학 출판사들도 이달 말 펴낼 계간지 겨울호에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미술계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지난 27일 일민미술관 행사에서 발족한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는 “성폭력을 자행하거나 묵인하는 인물과 기업이 퇴출될 수 있도록 정보를 적시할 것이며, 여성 디자이너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찾아내는 활동으로 연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양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여성혐오 고발 사례를 아카이빙해 출판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② 계속되는 형법상 ‘낙태죄’ 폐지 운동

‘낙태죄’ 폐지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정부의 ‘임신중절수술 처벌 강화’ 계획은 무산됐다. 전국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가 열리고, ‘#낙태죄폐지’ ‘#내 자궁은 나의 것’ 등 SNS상 해시태그 운동이 이어지고, 의료계도 압박에 나서자 정부는 지난 11일 해당 계획을 철회하고 수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보장하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떠넘기지 말라’는 여성들의 요구는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제269조 1항도, ‘유전적 문제나 질환, 성폭행에 의한 임신 등의 이유에 한해서만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낙태를 허용한다’는 모자보건법 제14조도 그대로다. 이 문제를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으로 보는 이들도 아직 많다. 

 

여성들은 임신중절 문제를 개별 여성의 문제가 아닌 ‘국가와 생명의 문제’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은 ‘아기집’이 아니며,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사회적 조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임신 중절을 택한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일은 부당하다는 뜻이다. 최근 임신중절 시술을 받은 박지현(가명·24) 씨는 “여자 혼자서도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이 임신중단을 했다는 이유로 낙인을 찍고 처벌하는 일은 잘못됐다. 아이 양육이 힘든 사회·경제적 조건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신중절 실태를 파악하고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단속을 강화해 낙태를 못 하게 해서 출산율을 높인다는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낙태 수술의 암시장화를 더욱 강화해 여성의 건강·모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관련기사 : 독일 여성들은 어떻게 낙태의 자유를 얻었나)

③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갈등 되풀이 조짐

올해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누리과정(만 3~5살 유아 무상보육 정책) 예산 분담 갈등은 또 반복될 조짐이다. 2017년도 예산안 법정시한(12월2일)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건만 여야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1월 29일까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11개 교육청은 2017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5곳(부산·대구·대전·울산·경북)만 어린이집·유치원 누리과정 예산을 전액 편성했다. 인천은 각각 7개월치만 편성했다. 

 

누리과정 예산은 내년에도 국고 예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여당은 대신 내년도 예산안에 ‘지방교육정책특별회계’를 신설해 5조2000억원을 편성하기로 했다. 그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들어가던 교육세를 별도로 떼어내 누리과정·방과후학교·초등돌봄교실 등에 의무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면 야당과 시·도 교육청은 중앙정부가 누리과정 예산을 전액 부담하고, 안정적인 교육재정 확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영유아보육·유아교육 완전국가책임제’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2012년 대선 공약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도 교육청이 국고보조금 등 별도의 재정 지원 없이 누리과정 예산을 부담하게 되면서 3년째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교육청은 “보육 기관인 어린이집은 정부 소관이므로 운영 예산도 책임져야”하고, “경기 악화로 인해 전국 시·도교육청의 부채가 2012년 약 10조원에서 올해 21조원대로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 재정악화는 안 된다”며 예산 편성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는 “어린이집은 유치원과 같은 교육과정에 해당하므로 교육청 예산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올해도 양측의 기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예산안의 법정시한 내 처리는 어려워 보인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지난해 말에는 민간어린이집이 정부의 보육지원료 인상을 요구하며 10월 28∼30일 집단 휴원에 들어갔고, 올해 초에도 유치원·어린이집에 누리과정 지원비가 지급되지 않아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는 등 ‘보육대란’이 일었다.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은 “수년간의 공방 속에서 부모와 교사, 어린이집의 불안감은 커져갔고 이제 더 이상 정치권만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없는 지경”이라며 “누리과정 보조금은 지방교육청과 지방정부사업이 아닌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국고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앞서 강조했다. 한국민간어린이집연합회는 “아이만 낳으면 국가가 잘 키워주는 그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학부모들이나 어린이집 원장·보육교사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무상보육이 되어버렸다“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마무리돼 무상보육 정책을 비롯한 국정이 정상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④ 잇따른 지적장애 여성 성폭력, 법원은 ‘솜방망이’ 처벌

성폭력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지적장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도 잇따랐지만 사회적 관심은 적었다. 지난 10월 25일 경북지방경찰청은 30대 지적장애 2급 여성을 유인해 성폭행한 혐의(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A씨 등 70대 남성 5명을 구속했다. 피해 여성은 2014년부터 최근까지 2년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피의자 5명 모두 70대 노인이다. 이들은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여성에게 접근한 뒤 범행을 저질렀다. 

지적장애인은 성폭력 피해를 겪어도 신고방법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성폭력에 대해 인지가 어려워 피해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위 도움으로 피해를 신고해도 피해 진술을 명확히 할 수 없고, 어렵게 재판에 넘겨져도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거나 대가성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로 감형되거나, 성매매 사건으로 판결 내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실제로 11월 22일 광주고법 전주 제1형사부는 지적장애 2급 장애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A(69)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의 원심을 깨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400만원에 합의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장애 성폭력을 보도하는 언론 보도의 문제도 크다. 한 언론은 자신의 집 위층에 사는 지적장애 1급 여성을 성폭행한 70대 남성을 보도하면서 ‘지적장애인·이종사촌에 몹쓸 짓’이라는 제목을 달아 가해 행위를 축소했다. 

배복주 장애여성 공감 대표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해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장애인을 건드린 나쁜 놈’ 정도로만 인식한다”며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가해자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유인하고 착취했느냐다”라고 강조했다. 배 대표는 “언론도 사건을 보도할 때 피해자가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지, 장애인이 성폭력에 얼마나 취약한지에만 집중한다”며 “장애인의 낮은 위치성을 악용해 유인하고 착취했는지 드러내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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