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여성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여성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참담하게도, 박근혜 정권의 파탄은 ‘여성 대통령의 실패’로 호명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뿌리 깊은 ‘여성혐오’도 높이 고개를 쳐든다.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100년 내로는 여성 대통령 꿈도 꾸지 마라” “대통령은 국민이 맡긴, 무한 책임져야 할 권력을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에게 던져주고 말았다” 같은 발언이 시장, 국회의원, 교수, 유명 진보인사 등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이들의 입에서 나왔다.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 “닭년” “병신년” 등 혐오 표현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혐오와 차별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으로 쉽게 이어진다. 일부 여성이 100만 촛불집회 인파 속에서 성추행·성희롱의 표적이 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여성들은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외치면서도, 그것으로 모든 여성혐오와 차별, 폭력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분노를 넘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여성들이 깃발과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여성들이 깃발과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단지 ‘여성’? 우리는 새 민주주의 만들 주체다

나영(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처장)

위축되지 말고 목소리 높여야

최근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미스 박’ 등 여성혐오적 발언이 넘치고, 여성 참가자들에게 신체 접촉을 하거나 “기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26일 집회에선 ‘인간띠’를 만든다는데, 여성들 사이에서는 “닿기 싫다” “우리 따로 다니면 안 되겠냐” 등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왜 여성들은 집회 현장에서조차 성폭력이나 혐오 발언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래도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집회 현장에서 여성혐오적 발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SNS 등을 통해 주최 측에 즉시 항의하고, 그러한 언행을 다 정리해 기록한다. 주최 측에서 이 문제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집회 사회자가 여성혐오 발언에 대한 사과·정정 발언을 한 적도 있다. 26일 집회에선 아예 발언 가이드라인을 명시한다고 했다. 앞으로도 주최 측이 여성혐오적 언행이 빈발하는 집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 방침을 세워나가야 한다.

더 많은 이들이 집회에 나가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위축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스스로를 피해자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근혜 대통령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뭉뚱그려 보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성들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새 민주주의를 만들 주체로서 집회에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메시지고, 계속 알려야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하는 집회에서도 위협받는 여성들

이지원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10번출구’ 운영진)

박 대통령 퇴진한다고 민주주의 오지 않아...성차별적 편견 해소부터

지난 12일 민중총궐기 집회날, 한 중년 남성이 ‘페미존’을 만들어 행진하던 페미니스트들에게 “여학생들이 기특하네” 라고 말했다. 여성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여성혐오적 편견에서 나온 말이다. 참가자들은 “아저씨도 기특하다!”라고 외쳤다. 한 술 취한 장년 남성은 한 여성 집회 참가자를 보고 “예쁘다” “미스코리아 같다”며 사진을 찍으려 했다. 온라인상 여성혐오도 심각했다. 팔로워 21만4201명을 둔 페이스북 페이지 ‘김치녀 시즌2’는 ‘여성이 인권이고 인권이 여성이다’ ‘혐오발언금지’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여성들의 사진을 ‘최순실보다 더 미친X들!’이라는 글과 함께 올렸다. 해당 게시물은 댓글 395개, 좋아요 및 공감 2197개, 공유 141회를 기록했다. 사진 속 여성들은 극심한 언어폭력에 노출됐다. (페이스북 코리아는 23일 해당 페이지를 삭제했다.)

‘왜 박근혜 퇴진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여성혐오 운운하느냐’라고들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박근혜 정권의 실패가 여성의 실패로 환원되는 여성혐오 사회다. 집회에 나가는 여성들이 성추행과 여성혐오적 발화를 걱정하는 것 역시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하는 공간에서조차 여성의 안전과 존엄이 위태롭다는 방증이다. 박근혜 퇴진 운동 내 여성혐오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저항은 보다 평등한 사회,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당위를 갖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퇴진 운동에 나선 모든 시민들이 이 운동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박근혜 퇴진 이후의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여성성에 덧씌워진 ‘열등함’, ‘무능함’ 같은 사회적 편견이 사라져야 한다. 여성이 동료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존중받는,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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