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정국 ‘여성혐오’ 여전 ‘년’ ‘아줌마’ 운운하며 조롱

외신 “박 대통령의 실패로 한국 여권 신장의 장애물”

여혐 반대 움직임도 활발 5차 촛불집회가 분수령

민주주의 실현의 첫 발은 여혐없는 성평등 집회부터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2016 민중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2016 민중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1월 26일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100여개 지역에서 5차 촛불집회가 열린다. 이번 촛불집회는 향후 정국의 향배를 가를 분수령이자 ‘성평등 집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촛불 정국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여성혐오’를 경계, 제지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며 남성 중심적인 집회 현장도 차별과 편견 없는 성평등 집회로 변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직 최초의 검찰 수사 피의자가 되고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에 대한 의혹들이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면서 한국 사회 뿌리 깊은 여성혐오가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12일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 19일에도 서울 60만명 부산 광주 등 지역에서 35만명(경찰 추산 26만명) 등 총 95만명이 촛불이 들었다. 25일에는 더 많은 촛불이 광장에 모일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박 대통령과 최씨를 향한 비판이 거세질수록 이들의 생물학적 성을 부각한 조롱과 욕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앞으로 여성 대통령은 100년 뒤에나 나올 것’ ‘강남 아줌마’ ‘O년’까지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가 여성임을 부각하는 여성혐오 발언은 온라인과 집회 현장을 가리지 않고 널려있다. ‘국정농단 사태’를 ‘여성’이 벌인 문제로 인식하고 이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여러 외신에서도 이번 사태의 여성혐오 분위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미국 ‘뉴욕 타임스’는 “박 대통령의 스캔들에게 여성이라는 문제가 두드러진 이슈는 아니지만, 일부에선 여성혐오적인 측면으로 비난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21일 보도했다.

촛불 정국 속 여성혐오는 집회 현장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민주주의 실현을 외치는 광장에서는 집회에 참석한 여성을 향한 성차별 발언과 성추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을 향해 ‘기특하다’ ‘개념있다’는 식의 성차별 발언이 이어졌다. 19일 4차 촛불집회에 앞서 열린 ‘페미토크’에 참석한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은 “지난 12일 ‘여자애들이 나와서 구호 외치는 모습이 기특하다’, ‘공부나 더 하지 왜 이런 데 나왔어?’라는 반응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100만 촛불이 모인 3차 촛불집회가 ‘평화집회’였다는 일부 평가와는 달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는 집회 현장에서 성추행을 경험한 여성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집회 현장에서조차 여성들은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집회 현장에서 여성혐오 발언과 혐오 문구를 담은 피켓을 마주한 여성 중엔 “집회 현장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반응도 많다. 최근 숙명여대에는 ‘내가 시위에 가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해당 대자보는 “시위 현장에서 성추행을 당하거나 ‘슴만튀’(여성의 가슴 만지고 도망치기)를 당한 여성들이 부지기수였다”며 “시위 나온 여성들 몰카를 찍어 못생긴 시위녀, 예쁜 시위녀로 나눠 품평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집회에서 더 이상 성차별과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여성이 광장을 떠날 것이 아니라 여성혐오를 하는 이른바 ‘반쪽짜리 진보’가 바뀌어야 할 문제라는 설명이다.

이 밖에도 여성혐오 발언을 하는 이들 중 일부는 대통령을 향한 욕과 조롱이지, ‘여성’을 향한 욕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한다. 또 다른 부류는 ‘해일이 이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식으로 아예 무시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이유로 여성혐오가 만연하자,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집회의 여성혐오 분위기를 경계하고 제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성혐오가 판치는 집회에서 혐오 발언과 차별 없는 성평등 집회로 나아가기 위해 촛불 정국 속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전 집회를 열고, 박 대통령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의 여성혐오 발언에 즉각 논평을 냈다. 집회를 주최하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도 여성단체의 목소리를 반영해 4차 대회부터는 성평등 집회를 위한 수칙을 담은 명함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사회자가 ‘미스박’ ‘아줌마’라는 표현에 즉각 사과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등의 페미니스트 모임 회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등의 페미니스트 모임 회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집행위원장은 “3차 때까지 집회 곳곳에서 여성혐오 발언이 있었지만 4차 집회부터는 확실히 바뀌고 있다”면서 “성차별적인 구조에서 여성 비하적인 욕설을 사용해 비판하기보다는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숙한 시민 문화를 보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성평등 집회 문화를 만들기 위한 모임도 만들어졌다.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박하여행)은 집회에서 벌어지는 성차별과 성폭력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모니터링을 진행 중인 조이다혜씨는 “집회 주최 측이 여성혐오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여성들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여성들이 성차별적 발언이나 성폭력이 발생하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집회 문화와 분위기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이씨는 “성평등한 집회 문화를 만들려면 먼저 집회 주최 측은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대책을 마련하고, 참가자들에게 공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일 페미존은 돌발상황을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는 ‘자경단’을 기획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사회자와 발언자의 발언 내용도 사전 검토와 주의가 필요하다”며 “이것은 검열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정치적 주체임을 확인하고,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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