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들이 선거권을 얻어내던

20세기 초 역사적 사건을

증언해주는 특별한 박물관

 

여성평등권 주장의 함의를

고민하게 해주는 성찰의 공간

 

미국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전경. 1800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19세기 미국 동부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이다.
미국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전경. 1800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19세기 미국 동부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이다.

“난 언제나 느끼고 있어요…. 그 운동은 일종의 모자이크이지요. 우리 각자가 하나의 작은 돌을 놓으면, 그 다음에는 결국 멋진 모자이크를 얻을 수 있지요.”

이 인용문은 여성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자신의 공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엘리스 폴(1885~1977)이 한 대답이다. 1977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3년 전에 이뤄진 『미국의 유산』 편집인 로버트 갤러거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고난스럽지만 빛나던 순간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 엘리스 폴의 인터뷰 기사를 접하고 한동안 그녀에게 매료된 적이 있었다.

미국 여성의 참정권 향한 의지

당시에는 노련한 타협주의자 캐리 채프만 캣(1859~1947)과 달리 서른을 갓 넘긴 패기에 찬, 급진적 신세대 여권론자라는 점에만 관심이 갔었다. 더구나 당시에 필자는 학문에 대한 열정은 과포화 상태였지만, 학위논문의 늪에 빠져 도무지 방향도 잡지 못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엘리스 폴이 그 어렵던 시절에 박사학위를 몇 개나 받았다는 대목에서는 특히 엄청나게 부러워했던 기억만 있었다.

엘리스 폴이 이념, 전략, 그리고 조직을 가진 명석한 활동가이자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를 살았던 성숙한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 알게 됐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선생이 된다고 하던가. 서양여성사를 강의하고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미국 참정권운동사와 그 속에서 엘리스 폴이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이뤄낸 선구자적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셈이다.

그녀는 수전 B 앤서니(1820~1906)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1815~1902)처럼 1848년 세네카 폴즈 선언을 이끌었던 1세대 여권론자들의 계보를 이으면서, 특히 여성의 참정권을 미연방 차원의 헌법적 질서 안에서 획득하기를 주장한 수전 B 앤서니의 수정조항을 끝까지 관철시킨 장본인이었다. 또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여성들도 영향력 있는 독립적인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알리는 수단이자 참정권 획득을 위한 구체적 조직으로 전국여성당을 창설했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9조(1920년)를 통과시키는 지루한 전투를 이겨냈다.

지난 5월 미국의 여성관련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미국 참정권운동사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 뉴욕주 세네카 폴즈의 수전 B 앤서니 박물관, 여성명예의 전당, 전국여성인권역사공원, 방문센터 등을 비롯해 뉴욕시 박물관 3층에 위치한 여성사연구센터 그리고 워싱턴의 여성예술가박물관과 전국여성사박물관 사무소 등이 탐방지에 속한다. 그런데 세계 여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각별한 역할을 반영하듯 미국 각지에는 다양한 여성관련 박물관이 있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의 대통령 낙선 상황을 지켜보면서 미국편 탐방기에서는 워싱턴 D.C. 한복판에 위치한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을 소개한다.

이 기념관은 1800년에 완공된 건물로, 올해 4월 전까지만 해도 최초의 집주인 로버트 씨월과 마지막으로 이 집을 구매한 알바 벨몬트(1853~1933)의 이름을 따서 씨월-벨몬트 하우스로 불렀다. 특히 알바 벨몬트는 전폭적인 재정적 후원으로 엘리스 폴과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조직인 전국여성당이 존속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한 여성이다.

엘리스 폴과 벨몬트에게 미국의 정치적 중심지 워싱턴의 국회의사당과 상원이 있는 곳에 여성평등권의 본부를 차리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현재의 헌정로 144번지에는 1929년부터 자리를 잡았다. 원래 라파예트 광장의 카메론 하우스에 차렸던 본부를 이곳으로 옮긴 데에는 워싱턴 의회 의석에 좀 더 다가간다는 전략적,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곳은 미국여성들이 선거권을 얻어내던 20세기 초의 역사적 사건을 증언해주는 장소다. 지난 4월 12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씨월-벨몬트 하우스를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으로 지정했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1층 로비. 벽면 양 쪽에 미국 여성참정권운동 활동가들의 초상화와 흉상이 전시돼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당시 그들은 헌법 19조에 여성참정권을 넣도록 주장하면서 “우리는 미국헌법에 여성 참정권 수정을 요구한다”고 외쳤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1층 로비. 벽면 양 쪽에 미국 여성참정권운동 활동가들의 초상화와 흉상이 전시돼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당시 그들은 헌법 19조에 여성참정권을 넣도록 주장하면서 “우리는 미국헌법에 여성 참정권 수정을 요구한다”고 외쳤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1층 상설전시관. 아이네즈 밀홀랜드가 당시 입었던 의상들을 비롯해 신문기사, 기념 뱃지 등이 그날의 상황을 보여준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1층 상설전시관. 아이네즈 밀홀랜드가 당시 입었던 의상들을 비롯해 신문기사, 기념 뱃지 등이 그날의 상황을 보여준다.

엘리스 폴의 지식 욕구와 학문 고민

미국여성들은 1920년에 엘리스 폴의 ‘물의를 일으키는’ 노력을 통해 선거권을 부여받았다. 엘리스 폴은 뉴저지 무어스타운의 독실한 퀘이커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녀는 스와트모어대를 졸업했고 사회학으로 석사를 받은 후(1907년) 1908~1909년 런던경제대에 머물었던 당시에 영국의 여성선거권 투쟁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 루시 번즈와 만났으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여러 차례 체포와 투옥을 당하다 추방됐다. 1910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엘리스 폴은 ‘펜실베이니아 여성의 법적 지위’를 주제로 1912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20년대 평등권수정조항(equal-rights amendment, E.R.A.)을 위한 투쟁의 시기에 그녀는 미국의 헌법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고 그 후 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으니(1927년), 실천적 지식에 대한 욕구가 남달랐다.

1878년 소위 ‘수전 B 앤서니 수정조항’으로 부르는 여성참정권 수정조항이 처음으로 의회에 상정됐으나, 그것은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사전트 등 소수 의원들의 관심을 얻을 뿐 의회의 위원회 문 밖으로 보도된 적이 없었다. 그 조항은 1896년에서부터 엘리스 폴이 워싱턴에 도착한 1912년까지 거의 소멸 직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리스 폴은 ‘수전 B 앤서니 수정조항’에 불을 붙여 살려냈다. 그것은 과감하고 도전적이었으며 그 전까지 미국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당시 미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은 1868년 수전 B 앤서니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이 주도하는 진보적인 ‘전국여성참정권협회(NWSA)’와 1869년 루시 스톤이 주도하는 온건한 ‘미국여성참정권협회(AWSA)’가 간신히 봉합을 시도하던 중이었다. 1890년에 ‘전미여성참정권협회(NAWSA)’로 통합됐고, 이 조직은 1915년경에 회원이 10만 명에 이르는 최대의 여성조직이었다.

1912년에 엘리스 폴과 루시 번즈는 NAWSA의 의회 위원회 회장과 부회장으로 지명됐고, 엘리스 폴은 1913년 워싱턴에서 미국의 28대(1913~1921)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맞이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를 조직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여성참정권을 위한 평화적 퍼레이드에 5000~1만명이 참여했으나 언론에 따르면 50만여명이 모여들어 난폭한 언사와 폭력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다시금 수정조항을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계기가 됐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은 당시의 상황을 잘 재현하고 있다. 기념관은 20세기 초에 미국사회를 뒤흔든 당찬 여성들의 목소리와 사회의 반향을 들려준다.

우선 현관에 들어서면 세네카 폴즈의 신화를 만들어낸 수전 B 앤서니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의 흉상, ‘전국여성당’ 본부를 구입할 돈을 기부한 벨몬트(1853~1933)의 흉상, 그리고 1층의 양쪽 벽으로 여성활동가들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1층 상설전시관에서는 1913년에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이끌던 아이네즈 밀홀랜드(1886-1916)가 입었던 의상들을 비롯해 당시 행진에 참가한 여성 및 군중사진, 대규모 퍼레이드에 사용됐던 깃발들, 그 당시 이 행사를 취재한 신문기사들, 그 당시 이용된 배지 등을 볼 수 있다.

1913년 3월 3일 퍼레이드에서 여성들은 대학·간호원·외국인·남성·흑인여성 섹션을 구성했다. 특히 흑인여성 섹션은 메리 처치 테럴이 이끄는 전국유색여성협회에서 참여했다. 원래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백악관으로 그 다음에는 헌정기념관으로 행진할 계획이었으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군중들의 난폭한 대응으로 도중에 차단됐다.

 

전국여성사박물관 임시전시관. 1996년에 여성사박물관 건립 기치를 내세우고 아직은 주로 사이버박물관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3월 여성의 달’ 행사를 비롯해 자료 발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1월 건물관의 최종부지 선정을 기다리고 있다.
전국여성사박물관 임시전시관. 1996년에 여성사박물관 건립 기치를 내세우고 아직은 주로 사이버박물관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3월 여성의 달’ 행사를 비롯해 자료 발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1월 건물관의 최종부지 선정을 기다리고 있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2층 상설전시관. 여성들은 미국 각 주 의원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의회 발언들을 낱낱이 수집하고 분석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타자기, 주별 상황 기록표 등이 당시의 긴장감을 전해준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 2층 상설전시관. 여성들은 미국 각 주 의원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의회 발언들을 낱낱이 수집하고 분석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타자기, 주별 상황 기록표 등이 당시의 긴장감을 전해준다.

 

기념관 선물숍. 당시 기금을 모으기 위해 만든 찻잔 모형을 구입할 수 있다. 그때는 우편엽서가 유행이었는데, 여성참정권론자를 조롱하고 비방하는 내용의 캐리커처가 인쇄된 우편엽서들이 주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기념관 선물숍. 당시 기금을 모으기 위해 만든 찻잔 모형을 구입할 수 있다. 그때는 우편엽서가 유행이었는데, 여성참정권론자를 조롱하고 비방하는 내용의 캐리커처가 인쇄된 우편엽서들이 주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여성참정권운동사 계보에서 얻은 전략

이 사건은 엘리스 폴이 퍼레이드에 대해 미온적 지지만 보냈던 NAWSA와 분리하는 계기가 됐다. 그녀는 ‘수전 B 앤서니의 수정조항’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여성참정권연합회의(CUWS)’를 만든 것이다. 엘리스는 주 의회보다 연방의회에 압력을 넣는 수전 B 앤서니의 전략을 주장한 것인데 반해 NAWSA는 이에 대해 반대했다. 결국, 엘리스 폴은 1914년 느닷없이 ‘샤프로스-파머 수정조항’으로 입장을 정한 참정권운동의 주류 세력과 결별하게 됐다. ‘전국여성당’의 결성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후 엘리스 폴은 이를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것은 그들이 영국의 팽크허스트를 비롯한 전투적 참정권론자들이 마주했던 현실에 직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여성참정권에 반대하는 민주당의 당론에 맞서고, 1916년에는 급기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재선차단과 정부압박을 위해 일련의 ‘물의를’ 일으킨다. 시위, 피켓시위, 정치공작, 거리폭력, 구타, 구류에 뒤이어 단식투쟁이 이뤄졌다.

2층 상설전시관은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1913년 퍼레이드 이후부터 1920년 여성참정권 획득과정, 포스터에 나타난 여성참정권에 대한 사회의 반응 등이 전시콘텐츠에 포함돼 있다. 물론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1920년 미국여성의 선거권 획득은 일정 정도 1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이며, 철저히 중간계급 백인여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양차대전 사이에 자유주의의 퇴조와 함께 페미니즘도 퇴조했으며, 결국 여성참정권 허용은 전반적으로 보수적 정치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지만 예컨대 1913년 퍼레이드에서 보듯 엘리스 폴이 흑인여성 섹션과 남성 섹션을 적극 포함시켰다든가, 벨몬트의 경우처럼 완전한 남녀평등권과 함께 전국 여성당을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제3정당으로 만들자는 주장 등을 고려하면, 미래를 향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벨몬트-폴 전국여성평등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이곳은 오늘날 젠더, 인종, 계급을 가로지르며 미국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솟구치는 시대에 100여년 전의 여성평등권 주장의 함의를 고민하게 해주는 성찰의 공간이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는 표류 중인 미국의 전국여성사박물관 건립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미국 여성들은 1996년부터 주 차원이 아닌 연방 차원의 전국적인 여성사박물관을 워싱턴 D.C. 중심인 박물관 몰에 건립하고자 애써왔다. 그런데 5월에 전국여성사박물관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실무진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이 여성사박물관을 더 먼저 건립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적어도 올해 11월 의회에서 최종부지 선정이 결정된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공사 중에 있는 박물관 몰의 빈터를 둘러보면서 미국 의회 안에도 여성혐오가 있다고 한 디바인 투르먼대통령도서관 관장의 말이 떠올랐고, 어쩌면 다시 연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미국사회에 여전히 여성혐오가 남아 있으며, 젠더관계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가 일정부분 미국 백악관에 여성대통령의 입성을 방해하는 기제로 작동한 것은 아닐까. 물론 힐러리 클린턴의 낙선은 여성의 실패라기보다는 온전히 정치가로서 그녀의 패착에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듬어내는 공간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세력에게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공간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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