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여성 대통령’ 슬로건으로

당선됐으나 여성정책은 후퇴

세계성평등지수는 추락하고

홍일점 장관에 동수내각 남의 일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것도 고려해 달라.”

현직 대통령 최초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된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의 이 같은 발언에 여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당선된 박 대통령이 지난 3년간 ‘여성 대통령’의 사명은 내던져놓고 필요할 때만 ‘여성’을 내세우고 이번에는 수사 회피용으로 또 다시 ‘여성 사생활’ 운운하는 것에 허탈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낀다는 반응이다.

박 대통령은 3년 전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이 당당하게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여성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3년이 흐른 지금 여성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실제로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36.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로, OECD 회원국 평균(15.6%)보다 두 배를 넘는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격차 보고서 2016’을 보면 한국은 144개국 중 116위를 기록했다. 또 다시 지난해보다 한 단계 하락했다. 여성이 대통령이 됐지만 유리천장은 여전히 견고하다.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는 4년 연속 OECD 최하위를 기록했다. 내각의 유리천장도 여전히 두텁다. 박 대통령이 임명한 여성 장관은 당연직이나 다름없는 여성가족부 장관 3명을 제외하면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유일하다. 여성과 남성 장관 수가 같은 동수내각을 구성한 캐나다와 프랑스와 비교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여성 대통령’을 자임하면서도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비선 실세’로 지칭된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파문이 연일 지속되고 있고, 수많은 비리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직자인 대통령에 대한 의혹을 ‘여성 사생활’이라는 표현으로 면피하는 것이냐는 비판도 거세다.

한국여성연구소는 17일 논평을 내고 박 대통령이 여성임을 내세워 당선됐으나 ‘여성 대통령’으로서 추진한 정책은 보이지 않고 여성과의 연대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연구소는 “자신의 범죄사실에 대한 조사를 회피하는 구실로 ‘여성의 사생활’을 내걸어, 여성이 마치 무책임하고 비겁한 존재인 양 보이게 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행태는 수많은 여성을 우롱하는 것이며 여성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여성 리더십의 실패’ 등의 여성의 문제로 몰아가는 여성혐오 분위기를 비판해온 여성계에선 이번 성차별 발언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여성 사생활’ 발언에 대해 “여성은 약하고 특별하게 보호받아야 하거나 배려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성차별적이고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발언”이라며 “대통령은 변호인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사생활’ 운운하지 말고, 즉시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국여성연대 등도 “‘여성’ 운운하다는 것 자체가 많은 여성들에 대한 모욕이자 차별과 혐오로 힘들어하는 여성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는 “지금 여성운동계나 촛불을 든 여성들은 이번 사건이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며 “그런데 오히려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는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 실망감이 크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이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당선됐고 이번에도 ‘여성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를 드러냈다”며 “성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여성들과 공감하고 연대해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여성 정치 지도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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