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타고 여성혐오가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사상 최대 ‘100만 촛불시위’ 현장에서도, 풍자와 조롱이 오가는 온라인 공간에서도 여성들은 성범죄와 여성혐오에 직면했습니다. 이에 대해 페이스북 페이지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운영진이 지난 14일 해당 페이지에 올린 글을 동의하에 소개합니다. 글에 대한 의견은 saltnpepa@womennews.co.kr 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 100만명이 모여 제3차 범국민행동 민중총궐기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이날 오후 종각역 인근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다. ⓒ변지은 기자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 100만명이 모여 제3차 범국민행동 민중총궐기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이날 오후 종각역 인근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다. ⓒ변지은 기자

1. SNS를 통해 집회 참여 여성들의 성추행 피해 제보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집회 현장에서 여성을 상대로 벌어지는 ‘엉만튀’, ‘슴만튀’ 성추행 범죄에 대해 주최 측은 아무런 대책도 세워 놓지 않고 있다. 여성들이 자신을 지키려면 자경단을 조직하거나 집회를 보이콧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면서 막상 기존의 가부장적 ‘강간 문화’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는 남성들을 고작 ‘집회 문화 바꾸기 캠페인’으로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광화문 집회에 나가는 것은 성범죄자들의 소굴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2.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를 향한 비판은 ‘부패 기득권층에 대한 심판’이라는 명확한 목표에서 이미 한참이나 비껴가 버렸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는 권력자가 아니라 ‘여성’으로 대상화되었으며 이는 권력이 아닌 ‘여성’을 겨냥한 발언들이 인터넷이든 집회 현장이든 가리지 않고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상황을 통해 입증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저잣거리 아녀자”, “병신년”, “도둑년”, “언니, 그만 내려와!”...) 최근에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얼굴 그림이 부착된 공중화장실 소변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왼쪽에 있던 이들과 오른쪽에 있던 이들은 현재 여성혐오라는 강력한 기제로 하나가 되어 있다. 여성에 대한 온갖 모욕적인 발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주최 측이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는 집회에 여성들이 굳이 참여해야 할 이유는 없다.

3. 좌우를 떠나 ‘대통령 하야’라는 구호로 뭉친 이들은 여성혐오 따위보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은 기존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득권을 쥔 채 살아 온 사람들이다. 설사 박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가부장적 권위와 젠더 기득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물러난다 해도 여전히 낙태는 불법일 것이고 스토킹은 경범죄로 취급당할 것이며 디지털 성폭행과 몰카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 것이다. 성범죄는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 여성은 꽃뱀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 외모주의 문화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대통령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여성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는 조금도 타격받지 않는다. (오히려 집회가 가부장적 질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러니 여성들이 굳이 집회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

4. 광화문에는 100만 명이나 모였지만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집회에 모이는 이들은 고작 백여 명뿐이다. 여성혐오적인 구호로 정의와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은 여성의 생존과 관련된 싸움에는 연대하지 않는다. 여성의 생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관심이 없는 것으로 끝나면 모를까 저들은 여성의 삶을 좀먹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부장적 질서에 가담해 그 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그러니 여성들에게 저들과의 연대를 강요해선 안 된다.

5. 최순실 씨를 끌어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의 싸움은 ‘철없는 고립주의’ 혹은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비난과 함께 철저히 무시당했다. 광화문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은 언론을 통해 오직 ‘외모’로서 소비될 뿐이다. 이 투쟁에서 부각되는 여성은 이대생도 집회 참여 여성도 아닌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정유라 씨가 전부다. 박 대통령은 ‘여성은 정치에 나설 자격이 없다’는 증거 사례로, 최순실 씨는 ‘강남 아줌마’로, 정유라 씨는 ‘김치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을 남성보다 저열한 존재로 만드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독재자 혹은 부패한 기득권층이라는 요소는 성별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정유라 씨는 ‘성별’로서 호명되고 ‘성별’로서 비판받는다. 범죄자들이 지은 죄가 아니라 범죄자들의 성별을 공격하는 집회에 바로 그 공격 대상인 성별을 가진 사람들, 즉 여성이 참여할 이유는 없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여성대회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에 참석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변지은 기자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여성대회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에 참석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변지은 기자

6. 그럼에도 굳이 민중총궐기에 참여하겠다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하면 된다. 참여하지 않는 여성의 선택이 존중받아야 하듯 참여하겠다는 여성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현재의 집회는 남성 중심의 질서로 구축된 국가를 남성 중심의 방식으로 수호하기 위한 거대한 맨스플레인일 뿐 여성을 위한 싸움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이 궁극적으로 끌어내려야 할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남성들의 젠더 권력이다. 새누리당이 아니라 젠더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거대한 남성 젠더 권력이 내세운 허수아비일 뿐이다. 허수아비 하나 끌어내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7. 여성혐오로 물든 민중총궐기에서 누가 ‘민중’을 부르짖든 거기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성추행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나가도 ‘시위녀’로 소비되는 것이 전부다. 집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여성이 있다고 해서 과연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성추행과 성적 모욕으로 가득 찬 공간을 누군들 들어가고 싶을까? 민중의 사명이니 국민의 명령이니 떠들기 전에 먼저 여성을 ‘민중’으로, ‘국민’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으면 여성들은 점점 ‘당신들만의 투쟁’에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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