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해괴한 요승 신돈

러시아 패망으로 몬 라스푸틴

구한말 왕후 민씨가 ‘언니’로

불렀던 무녀 진녕군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돌고 도는 역사

 

‘비선실세, 국정농단.’ 무슨 사자성어도 아닌데, 올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 여덟 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무능한 권력은 첨삭지도해주는 이가 없어서인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결국 대한민국의 시계는 암흑천지다.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수상한 시절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그 옛날에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은 끊이지 않았다.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 바 있는 고려말 해괴한 중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제 마음대로 정략을 펼치면서 고려를 망국으로 내몰았다. 능력으로 보자면 신돈은 출중했던 것 같다.

2006년 출간된 『신돈과 그의 시대』를 보면 사대부들은 ‘요승’이라고 비난했던 신돈을, 여인들은 ‘신승’ 즉 신통한 승려 또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문수후신’이라고 불렀고, 노비들은 ‘성인’이 오셨다고 찬양했다. 하지만 대의를 잊은 신돈은 지극히 사랑한 노국공주 사후 국정의 방향을 잃은 공민왕을 쥐락펴락하면 권력의 단맛에 빠져들었다.

비선실세의 대표주자하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얼마나 방탕했으면 러시아 말로 ‘방탕한 사람’이라는 뜻의 라스푸틴을 성(姓)으로 갖게 된, 러시아 제국을 패망으로 내몬 주인공 라스푸틴이다. 환자를 고치는 능력과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라스푸틴은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혈우병을 호전시킨 덕에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라스푸틴은 황궁에서는 겸손한 척 지냈지만, 궁 밖에서는 호색한이었다. 자신과 육체적으로 접촉하면 정화와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수많은 정부들을 얻었고 또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 이를 안 대신들이 황제와 황후에게 간했지만, 이들은 좌천되거나 귀향을 갔다. 니콜라이 2세가 제1차 세계대전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자 내정을 맡은 황후의 개인 고문이 되어 국정을 농단했다. 러시아 혁명사를 다룬 여러 책에 라스푸틴의 이름이 등장하며 특히 영국의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가 쓴 『속삭이는 사회』에는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10월 31일 오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10월 31일 오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신돈 이후 잠잠하다 싶었는데, 100여 년 전에 또 한 번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버젓이 자행됐다. 뮤지컬과 드라마 때문에 과대 포장된 ‘명성황후’라 불렸던 왕후 민씨와 그가 총애한 무녀 진녕군이 두 주인공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왕후 민씨는 충주 장호원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구중궁궐 편안한 삶에 익숙한 왕후가 궁벽한 민가가 편할리 만무했다. 적적한 마음에 용하다는 무녀를 불러들였다. 이성녀라는 이름의 무녀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왕후가 궁궐로 돌아갈 날은 정확히 맞히면서 왕후와 궁궐로 진출했다.

무녀는 스스로를 관우의 딸이라고 주장했는데, 함께 궁궐로 들어온 무녀는 왕후의 몸이 아프면 “머리로 머리를 문지르며 배로 배를 문질러” 고통을 잊게 하는 별난 치료도 서슴지 않았다. 왕후는 고종에게 간하여 무녀에게 군호를 내리게 했으니, 이런 이유로 후세에 진령군 혹은 북관부인이라 불렀다. 이와는 별도로 왕후는 진령군을 ‘언니’라고 불렀으니 요즘 돌아가는 세태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실력자인 왕후 민씨의 총애를 받았으니 당연히 국정농단에 나설 수밖에. 얼마나 위세가 컸으면 윤영신, 조병식, 리용직 같은 간신배들은 왕후의 언니, 즉 진령군에게 “자매결의”하자고 졸랐고, 그 덕에 모두 좋은 자리에 앉았다. 어떤 이는 자식을 양자로 주겠다고 했으니 위세만큼은 왕 저리 가라였다. 아들 김창렬에게는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 실세 노릇을 하게 했다. 요즘 누구처럼 국고도 엄청나게 빼 먹었다. 훗날 임금 순종이 세자 시절 허약했는데, 그 병을 고친다고 굿을 벌였고, 금강산 1만2000봉에 쌀 한 섬과 돈 1000냥, 무명 한 필씩을 가져다 놓게 했다. 말이 좋아 정성을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 쌀과 돈, 무명은 진령군 일파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후 민씨는 진령군을 싸고 돌았다. 진령군은 나랏돈으로 서울 여러 곳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매관매직 등을 일삼으며 돈을 불렸다. 한심한 것은 왕과 왕비도 진령군을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벌였다는 것이다. 진령군의 세도는 11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의 국정농단을 간하는 상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요즘 돌아가는 현실과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구나 싶다.

그런 진령군도 청일전쟁 직후 친일 내각, 일명 개화파라 불리는 이들에게 축출당하고 만다. 그의 비위 사실은 별다른 조처 없이 끝났고, 왕후 민씨가 시해되자 충격인지 얼마 뒤 뒤따라 죽고 만다. 진령군에 관한 기록을 일부라도 남긴 사람은 매천 황현이다.

한말 순국지사로 동학농민전쟁의 실상을 기록했던 『오하기문』에서 매천은 왕후 민씨와 진령군 이야기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편쳔체, 즉 연월일 방식으로 기록한 『오하기문』을 새롭게 번역해 오늘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번역한 책이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다. 역사에서 배워야만,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법이다. 오늘의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록을 남겨야 하고, 거기서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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