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문화제 후 시민들이 촛불로 길 한켠에 만들어 놓은 ‘하야’라는 글자를 한 어린이가 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문화제 후 시민들이 촛불로 길 한켠에 만들어 놓은 ‘하야’라는 글자를 한 어린이가 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공(公)’과 ‘사(私)’의 이분법은 경합과 투쟁으로 점철된 개념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일찍이 정치적 모더니티의 문턱을 넘는 과정에서 ‘공적인 권력’의 해석을 둘러싼 의미론적 투쟁이 왕의 신체에 긴박된 주권을 시민들의 정치체로 옮기는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을 추동했다면, 1968년 혁명의 과정에서 탄생한 여성해방운동은 이른바 개인의 ‘사적인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신화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16년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의 혁명적 테마를 다시금 환기시키는 일련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을 경험하고 있다.

의혹이 커지고 한 시민 남성의 제안으로 ‘#그런데_최순실은?’의 해시태그(#) 문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봇물처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기사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대통령이란 선출된 공직의 권한과 책임을 방기한 채 이를 엄폐물로 삼아 사리사욕을 추구한 자들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는 실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엄청난 사태가 한 개인의 고질적인 독선과 무능을 넘어서 속칭 ‘비선실세’ 및 온갖 배후 세력과 연결돼 있었다는 것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가운데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10% 미만으로 급격히 주저앉았다. 분노한 시민 대중은 민주공화국의 헌정질서를 유린한 자들의 엄정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고 있으며, 청소년과 대학생을 비롯해 많은 시민 여성들이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와 ‘퇴진’을 외치면서 차가운 날씨에 아랑곳없이 광장을 찾아 촛불을 밝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숨가쁘게 전개되는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낙태죄_폐지’를 위한 #검은시위를 비롯해 여성들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하고 긴급한 젠더 이슈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지극히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일례로 한 저명한 소설가의 성희롱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트위터를 비롯한 SNS 공간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이란 이름으로 다른 많은 사건들의 피해를 증언하는 당사자와 이를 목격한 주변인의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해시태그 여성운동’은 다른 분야의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피해자들의 발화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데 #문화계_내_성폭력, #오타쿠_내_성폭력, #예술계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음악계_내_성폭력, #공연계_내_성폭력, #교육계_내_성폭력, #대학_내_성폭력, #직장_내_성폭력, #교회_내_성폭력, #스포츠계_내_성폭력, #언론계_내_성폭력, 나아가 #가족_내_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해시태그의 키워드들은 실로 없는 것이 없는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이는 공적 지위의 남용과 사생활의 이름으로 성적 착취가 일상화된 공화국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현장이다.

“지배계급의 국가는 공적이지도 않고 사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관한 모든 구별의 조건”이라는 알튀세르의 말은 공·사 영역을 망라하는 작금의 착종된 위기에 대해 시사적이다. 하지만 여성 대중이 경험하는 지배의 전횡이 계급의 그것에 국한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공·사영역의 자의적 구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성차별적 억압과 여성 배제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여성해방운동의 슬로건이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간주되는 까닭은 공·사 영역을 막론하고 이러한 차별과 폭력의 역사가 무한궤도마냥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국(res publica, the public things)’의 본래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지금은 분명 깨어 있는 시민들이 ‘공적인 것’을 은밀하게 해체해 사유화하는 세력에 맞서 법치국가의 헌정질서를 회복하고 공화국의 정상화를 지향해야 하는 비상한 시국임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민주공화국 시민이라면 일상의 차별과 폭력의 피해 경험을 공론화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지지하고 연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정치의 사유화/사사화’에 분노하는 시민적 저항과 더불어 해시태그(#)를 통한 공론화로 ‘사적인 것의 정치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2016년의 오늘이, 끝없이 변주되는 낡은 역사의 유제를 청산하는 변곡점이자 민주공화국에 걸맞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탄생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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